힐베르트

힐베르트

다른 표기 언어 David Hilbert
요약 테이블
출생 1862. 1. 23,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사망 1943. 2. 14, 독일 괴팅겐
국적 독일

요약 기하학을 일련의 공리로 환원했고 그 뒤 수학의 형식주의 기초를 세우는 데 공헌했다. 1909년에 이룬 적분방정식의 성과는 20세기 함수해석학을 낳았다.
1884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끝내고 교수(1886~95)로 있었다. 1895년 괴팅겐대학교 수학 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괴팅겐대학교는 19세기에 C. F. 가우스, P. G. L. 디리클레, B. 리만 등의 공헌으로 수학이 번영했으며, 20세기의 초기 30년 동안 이 수학적 전통은 주로 힐베르트로 인해 더욱 빛났다. 매우 독창적인 방법으로 수학의 불변량을 광범위하게 수정했고 모든 불변량이 유한수로 표현된다는 불변량의 정리를 증명했다. 1899년에 출판한 <기하학 기초>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공리들을 모아 중요성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대중적인 이 책은 기하학을 공리에 의해 다루는 데 전환점이 되었다.

힐베르트(David Hilbert)
힐베르트(David Hilbert)

기하학을 일련의 공리(公理)로 환원했고 그뒤 수학의 형식주의 기초를 세우는 데 공헌했다.

1909년에 이룬 적분방정식의 성과는 20세기 함수해석학을 낳았다.

그는 1884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끝내고 조교수(1886~92)·부교수(1892~93)·정교수(1893~95)로 있었다. 1892년 카테 제로쉬와 결혼해 프란츠를 낳았다. 1895년 괴팅겐대학교 수학 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괴팅겐대학교는 19세기에 C. F. 가우스, P. G. L. 디리클레, B. 리만 등의 공헌으로 수학이 번영했으며, 20세기의 처음 30년 동안 이 수학적 전통은 주로 힐베르트로 인해 훨씬 더 빛났다.

괴팅겐대학교의 수학연구소에는 전세계에서 학생들과 방문객들이 몰려왔으며 수리물리학에 대한 그의 열정으로 그 대학의 물리학과도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동료이며 친구인 수학자 H. 민코프스키가 1909년 때아닌 죽음을 맞을 때까지 수학을 물리에 새롭게 응용하는 연구를 도왔다. 힐베르트가 괴팅겐대학교에 재직하는 3명의 노벨 물리학 수상자(1914 M. 라우에, 1925 J. 프랑크, 1932 W. 하이젠베르크)들이 중요한 경력을 쌓았다.

그는 매우 독창적인 방법으로 수학의 불변량(회전·확장·반사와 같은 기하학적 변화 기간 동안에 바뀌지 않는 양)을 광범위하게 수정했고 모든 불변량이 유한수로 표현된다는 불변량의 정리를 증명했다. 1897년에 출판된 대수적(代數的) 수론(數論)에 관한 보고서 〈수에 관한 주해 Zahlbericht〉에서 그는 이 주제에 관해 이미 알려진 것들을 하나로 묶어 정리했고, 뒤이은 발전의 길을 제시했다.

1899년에 출판한 〈기하학 기초 Grundlagen der Geometrie〉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공리들을 모아 중요성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대중적인 이 책은 10판까지 나왔고, 기하학을 공리에 의해 다루는 데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1900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수학자회의에서 발표한 23가지의 연구과제로 명성을 얻었다(힐베르트의 23가지 문제). 그는 〈수학의 문제들 The Problems of Mathematics〉이라는 발표에서 그당시의 거의 모든 수학문제를 조사해서 20세기 수학자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제들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뒤 그 문제들의 대부분이 풀렸고 각 해는 모두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문제 중 하나는 부분적으로 리만 가설의 해가 필요한데, 리만 가설은 보통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풀리지 않는 문제로 여겨진다(정수론). 1905년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의 첫 볼프강 불리아이상은 H. 푸앵카레에게 돌아갔으나 힐베르트는 특별표창을 받았다.

1905, 1918년에 힐베르트는 일치성(논리에서 유한단계 추론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원리)을 증명하여 수학에 확고한 기반을 닦으려고 했다. 그러나 1931년 오스트리아 태생 미국의 수학자 K. 괴델은 명제가 결정이 가능하지 않게 만들어질 수 있어서 수학공리가 모순을 이끌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음을 증명함으로써 이 목표는 달성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베르트 이후의 논리학은 그 이전과는 다르게 발달했는데 그가 수학의 형식주의적 기초를 세웠기 때문이다.

1909년경 적분방정식에서의 그의 업적은 곧바로 20세기 함수해석학(함수에 대해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 연구를 유도했다. 이 업적은 수학 분석학과 양자역학에 유용한 개념인 무한차원공간(나중에 힐베르트 공간으로 불림) 연구에 기초가 되었다.

힐베르트는 적분방정식에 이 결과들을 응용한 기체분자운동론과 복사이론에 관한 중요한 논문으로 수리물리학에 크게 기여했다. 1909년 그는 모든 n에 대해 임의의 양의 정수는 일정한 개수의 n제곱수들의 합과 같다(예를 들면 n=2일 때 5=22+12)는 정수론의 가정을 증명했다. 1910년 2번째 불리아이상은 힐베르트가 받았고, 푸앵카레는 찬사의 글을 보냈다.

1930년 괴팅겐대학교를 은퇴하던 해에 힐베르트는 쾨니히스베르크 시의 명예시민으로 선정되었는데 〈자연과 논리 Naturerkennen und Logic〉라는 연설문에서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고,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라고 한 말을 통해 수학에 쏟은 그의 열정과 수학을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바친 헌신적 일생을 엿볼 수 있다.

1939년 스웨덴 아카데미의 미타그-레플러 상 첫 수상자는 힐베르트와 프랑스 수학자 에밀 피카르였다. 힐베르트 생애 마지막 10년은 나치 정권에 의해 그와 많은 제자·동료들에게 닥친 비극의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