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커

후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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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54(?). 3, 잉글랜드 데번 엑서터 헤비트리
사망 1600. 11. 2, 켄트 캔터베리 근처 비셥스본
국적 영국

요약 독특한 성공회 신학을 주창한 영국의 신학자, 영어 산문과 법철학의 대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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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옥스퍼드 시절
  3. 템플 칼리지 학장
  4. 주요저서
후커(Richard Hooker)
후커(Richard Hooker)

개요

미완성으로 남긴 걸작 〈교회정치법에 관하여 Of the lawes of ecclesiasticall politie〉에서 로마 가톨릭과 청교도에 맞서 영국국교회를 변호하고, '쉽게 끊어지지 않은 세 가닥 줄', 즉 성서·교회·이성(理性)이 영국국교회의 전승이라고 주장했다.

옥스퍼드 시절

후커는 1553년말 또는 1554년초 엑서터 시 근처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상 대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솔즈베리의 주교 존 주얼이 후원자가 되어준 덕분에 1568년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당시 영국국교회는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후커도 제네바 프로테스탄트 신앙 전승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옥스퍼드대학교의 주요학자들은 국교회의 〈성공회기도서 Book of Common Prayer〉에 충실했고, 교회법이 요구하는 성직복을 입고 강의했다.

언제나 견고한 국교도였던 후커는 자유로운 칼뱅주의를 넘어선 분야까지 공부했고, 당시 가장 뛰어난 성서 해설서, 초대 교회 교부들의 저서, 심지어 르네상스 시대 토마스주의(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철학학파) 저서들을 폭넓게 읽었다. 그러므로 편협하고 비실용적인 칼뱅주의의 한계들을 회피하고 폭넓은 르네상스풍의 지식인이 되었다.

그는 과거에 갖고 있던 좁은 사상들을 버리고 자신의 견해를 키웠다고 말했다.

템플 칼리지 학장

1573년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장학생이 되었고 1577년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그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1585년 템플 칼리지의 학장에 선출되었다. 이 직위를 놓고 그와 경쟁한 인물은 열렬한 칼뱅주의자 월터 트래버스였다. 트래버스는 〈교회 권징을 옹호함 Ecclesiasticae disciplinae defensio〉을 저술한 유능한 인물이었다. 이때까지 그는 아직 국교회의 성직을 받지 못했으나 템플 칼리지 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충실한 국교도인 후커는 오전에 설교했고, 확고한 칼뱅주의자인 트래버스는 오후에 설교했다.

그러므로 템플 칼리지 교회 회중들은 오전에는 캔터베리를 듣고 오후에는 제네바를 듣는다는 말이 생겼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패배함에 따라 영국국교회는 로마 가톨릭 세력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 위협으로 떠오른 것은 칼뱅주의였는데, 교리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조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지역에는 개혁주의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조그만 독실들, 즉 비밀집회소들이 곳곳에 있었다. 이들의 급진주의는 큰 호소력을 갖고 있었고 일반대중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주교들조차 이들을 함부로 진압할 수 없었고 무방비 상태로 세력이 증가하도록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트래버스는 저지대 국가들의 개혁교회를 본떠 오후 회중들을 대상으로 조직을 결성했고, 후커에게 템플 교회에서 개혁교회에 입각한 조직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후커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본떠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시도한 로마 가톨릭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결정사항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인정하고 그들의 사상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런 태도는 스콜라주의자들의 가르침을 한낱 쓰레기로 생각한 트래버스에게는 저주나 다름없었다. 후커는 템플 교회의 목사관에서 살지 않고, 영국국교회의 좋은 친구인 존 처치먼의 집에서 산 것 같다. 이렇게 된 데는 2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목사관이 잘 정돈되어 있지 않았고, 둘째, 트래버스가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588년 2월 13일 템플 칼리지의 학장으로 있는 동안 후커는 친구이자 집주인 존 처치먼의 딸 조안 처치먼과 결혼했다.

영국의 저술가이자 전기작가 아이작 월턴의 이야기에 따르면, 후커는 장인 될 사람에게 속아 그의 못생긴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그후 300년 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1940년 후커의 토지재산에 관한 형평법 법원(Court of Chancery)의 기록들을 조사한 결과 그 이야기는 〈교회정치법에 관하여〉의 마지막 권들이 완성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꾸며낸 것임이 드러났다. 조안 처치먼은 많은 액수의 결혼지참금을 가지고 왔다.

후커는 결혼할 당시 재산이 없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죽을 때는 상당한 부동산을 남겼다.

주요저서

1591년 템플 칼리지의 학장직을 사임한 뒤 장인의 집에 머물면서 걸작 〈교회정치법에 관하여〉를 썼다.

이 책은 '경고논쟁'으로 알려진 오랜 투쟁에서 마지막 중재 역할을 했다. 즉 1572년 6월 급진적인 종교개혁자들은 비밀 출판사를 통해 〈의회에 경고함 An Admonition to the Parliament〉을 발행했는데, 이 책자는 비록 엘리자베스 여왕이 의회에서 그 내용을 논의하지 못하도록 금지했음에도 청교도들(국교회 안에서 칼뱅이 제네바에서 발전시킨 노선들을 따라 급진개혁을 일으키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강령이 되었다.

〈의회에 경고함〉이 지니는 영향력 때문에 새로이 경각심을 갖게 된 주요주교들은 답변이 필요함을 알았고, 캔터베리 대주교는 케임브리지대학교 부총장 존 휫기프트에게 〈의회에 경고함〉에 답하는 글을 쓰도록 부탁했다. 휫기프트는 반박의 글을 쓴 뒤에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이자 대표적인 청교도 성직자인 토머스 카트라이트에게 다시 반박을 받았다.

〈교회정치법에 관하여〉는 이 논쟁으로 일관했다. 후커가 템플 칼리지를 떠날 때는 〈의회에 경고함〉이 영국 사람들의 정신에 더욱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반박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았다. 〈교회정치법에 관하여〉는 원래 8권으로 계획되었으나 후커의 생전에는 5권째가 마지막이었다. 후커 아내의 도움을 받은 청교도 목사들이 나머지 책들의 원고를 없애버렸다는 전승도 있으나, 옳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 책들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단지 후커가 죽기 전에 그 원고들을 미처 수정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교회정치법에 관하여〉에서 후커는 로마 가톨릭교도들과 청교도들을 동시에 배척한 엘리자베스의 교회를 변호했다(성공회). 그는 성서·교회·이성이 국교회 전승의 삼중 권위라고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성서와 전승을 신앙의 동등한 권위로 삼은 반면, 청교도들은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보았다. 후커는 양극단을 피하고서, 성서가 단순명백하게 말할 때는 그 절대 권위를 인정하지만, 침묵을 지키거나 모호하게 말할 때는 교회의 전승에 자문을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3번째 권위는 인간 이성에 있는데, 성서와 전승이 명쾌한 해설을 필요로 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대답하지 못할 경우는 반드시 인간 이성에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커가 갖고 있던 교회와 국가 관계에 대한 견해의 핵심은 통일성에 있었다. 그는 청교도들이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채택했다고 보았다. 그들은 여왕의 교회를 배척하면서 동시에 여왕에게 충성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법률과 이성에 의하면 모든 영국 사람은 반드시 국교도이어야 하고, 엘리자베스를 국가원수이자 교회의 최고 통치자로 섬기기로 서약해야 했다.

전승에 따르면 후커는 템플 칼리지의 학장직을 마친 뒤 드레이턴 뷰챔프와 보스콤에서 목회사역을 했다고 하지만, 교구목사로서 월급을 받으면서 동시에 소교구에서 요구하는 의무들을 이행하기 위해 성직을 겸임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1595년 캔터베리 근처 비셥스본의 교구목사에 임명되었고, 1597년 〈교회정치법에 관하여〉 제5권을 출판했다. 1600년 죽은 뒤 비셥스본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