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츨

헤르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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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0. 5. 2, 헝가리 부다페스트
사망 1904. 7. 3, 오스트리아 에들라흐
국적 오스트리아

요약 오스트리아의 시온주의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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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시온주의로 전환
  4. 최초의 시온주의 대회
  5. 후기 업적들

개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을 정치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유대인 국가 The Jewish State〉(1896)라는 소책자에서 유대인 문제는 세계가 해결해야 할 정치적인 문제라고 제창했다. 그는 세계 시온주의자 대회를 조직해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그 대회에서 설립된 '세계 시온주의자 조직'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지기 40년 전에 죽었으나, 시온주의를 세계적으로 중요한 정치운동으로 부각시키는 데 많은 이바지를 한 정력적인 조직가·선전가·외교가였다(정치적 시온주의).

초기생애

부유한 중산층 부모에게서 태어나 처음에는 과학중등학교에서 공부했으나, 그 학교의 반유대인적 분위기 때문에 1875년에 대부분의 유대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했다(반유대주의). 1878년 가족이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이사하여 빈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1884년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으나 문학에 몰두해 여러 해 작가생활을 했으며, 극작가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1889년 빈의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의 딸 율리 나샤우어와 결혼했다. 3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다. 헤르츨은 어머니에게 강한 애착을 가진 반면, 아내는 시어머니와 관계가 좋지 못했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그가 후에 아내가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치활동을 하면서 더욱 커져갔다.

시온주의로 전환

헤르츨은 빈의 유력한 신문 〈자유신문 Neue Freie Presse〉에 단편소설을 기고한 직후 그 신문사의 파리 특파원으로 임명되면서 생애에 중대한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1891년 가을 아내와 함께 파리에 도착한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늘 겪던 반(反)셈족주의를 프랑스 혁명의 본고장에서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그는 반셈족주의를 유대인들이 고유한 생활방식을 포기하고 현지인들과 동화되어야만 극복할 수 있는 사회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사회·정치 분야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늘어감에 따라 반셈족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동화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도 이 확신을 굳혀주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군사문서가 독일 정보원에게 넘겨진 사실이 밝혀졌을 때 알프레드 드레퓌스라고 하는 유대인 장교가 누명을 쓰게 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정치 논쟁으로 번지고 프랑스 대중 사이에 반셈족주의가 드높아졌다. 훗날 헤르츨은 회상하기를, 자신은 드레퓌스 사건 때문에 시온주의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반셈족주의가 존재하는 한 동화란 불가능하며, 유일한 해결책은 국가를 세워 조직적으로 그곳에 이민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유대인 국가에 대한 생각은 헤르츨이 처음 구상한 것은 아니다.

정통 유대인들을 조상대대로 시온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다. 1799년 나폴레옹은 이스라엘의 옛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영국의 정치가였던 유대인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시온주의의 정신이 담긴 소설 〈탕크레드 Tancred〉(제1차 십자군을 이끈 장군)를 썼다. 카를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동료인 모제스 헤스는 〈로마와 예루살렘 Rom und Jerusalem〉(1862)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책에서 그는 유대인 국가를 회복하는 것이 유대인들과 나머지 인류 모두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많은 집단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농업 식민지로 이민하여 정착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1881년 러시아에서 유대인 대학살 사건이 벌어진 후 레오 핀스케르는 〈자력 해방 Auto-Emanzipation〉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서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 식민지 건설을 지원하라고 호소했다.

헤르츨은 몇 년 뒤 그 소책자를 읽고 일기에 쓰기를, 만일 그 책을 진작 읽었더라면 〈유대인 국가〉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시온주의자로서 헤르츨의 최초의 노력은 당시에 손꼽히는 부자였던 모리스 드 이르슈 남작을 방문 취재한 일이다. 드 이르슈는 러시아와 루마니아에 사는 유대인들을 아르헨티나와 그외의 아메리카 지역에 정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인 이민협회를 세운 사람이었다.

35세의 헤르츨은 22쪽의 문서를 가지고 파리에 있는 남작의 대저택에 도착하여 유대인 문제에서 남작이 보여온 박애주의적인 노력에 모든 것을 내맡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그들 자신의 깃발 아래 규합하기 위한 정치 조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대화는 드 이르슈 남작보다는 헤르츨 자신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남작은 그의 말을 일축했던 것이다. 헤르츨은 남작에 대한 취재를 마친 뒤 1896년 2월 빈에서 〈유대인 국가〉라는 유명한 소책자를 출판했다.

그는 이 책자에서 유대인 문제는 사회문제나 종교문제가 아니라 오직 그것을 '세계 문명국들이 모여 토의하고 해결해야 할 세계적인 정치문제'로 삼아야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민족적인 문제라고 했다. 헤르츨의 몇몇 친구는 그것을 정신나간 구상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소책자는 동유럽의 시온주의 단체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1896년 6월 헤르츨은 오스만 제국의 군주에게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넘겨달라고 부탁할 목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가던 중 그가 탄 열차가 불가리아의 소피아에 정차했을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정거장에 나와 그에게 인사하고 그를 지도자로 환영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11일이나 머물렀지만 끝내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이때부터 조직가와 선전가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로부터 8년 뒤에 죽었다.

최초의 시온주의 대회

헤르츨은 자기 계획을 뒷받침해줄 유대인들을 조직하려고 런던으로 갔다.

영국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의 정치적인 접근이 자기들의 이상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지는 않았으나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열린 대중집회들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키가 크고 수염이 검고 길었으며 예언자의 풍모를 갖춘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인격적인 감화력에도 불구하고 영국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헤르츨은 자신의 노력이 소용없음을 깨닫자 모든 나라에 퍼져 있는 유대인 대중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려는 희망을 품고 시온주의자 세계대회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뮌헨에서 대회를 열자고 제안했으나 이미 대부분 동화한 그곳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바젤에서 1897년 8월말에 대회를 열었다. 200명가량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중앙·동부 유럽과 러시아에서 왔으며 소수는 서유럽과 미국에서 파견되었다. 그들은 정통파 유대인들로부터 무신론자 유대인들까지, 사업가에서 학생까지 모든 사회계층 및 모든 유대인들의 다양한 사상을 대표했다. 그외에도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본 일부 그리스도교도들과 국제대회를 취재하러 모인 기자 등 수백 명의 참관인들이 있었다.

헤르츨이 인상적인 모습으로 연단에 서자 우뢰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 이제 유대 민족의 피난처가 될 집을 위해 초석을 놓읍시다. 시온주의는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유대주의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헤르츨을 충실히 지지하던 작가 막스 노르다우는 유대인들이 동·서 유럽에서 겪고 있는 곤경을 묘사하는 훌륭한 연설을 했다. 3일 동안 계속된 대회는 이후에 '바젤 계획'으로 알려지게 된 계획을 채택하고서 이렇게 선언했다.

"시온주의는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들을 위해 공식적으로 보장되는 조국을 세우기를 열망한다." 그 대회는 또한 시온주의자 조직을 결성하고 헤르츨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후기 업적들

그는 생애 마지막 7년을 생계를 꾸리기 위해 〈자유신문〉의 문학편집을 한 것 외에는 시온주의의 이상을 증진시키기 위해 모든 시간을 바쳤다.

그는 빈에서 시온주의 신문 〈인간세계 Die Welt〉를 독일어 주간지로 창간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는 헌장에 터키 군주의 동의를 받아내려고 협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뒤 그는 영국으로 갔다. 영국은 자국 영토인 시나이 반도에 유대인 정착지를 설립하는 것에 호의를 갖고 있는 듯했다.

이 계획이 실패하자 영국은 아프리카 동부의 우간다를 제의했다. 헤르츨을 비롯한 일부 시온주의자들은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1903년의 시온주의 대회에서 특히 러시아 유대인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으며, 헤르츨은 그 대립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1904년 7월 3일 44세의 나이로 빈 근처의 에들라흐에서 심장병으로 죽었다. 그는 빈에 묻혔으나 그의 유해는 1949년 유대인 국가가 수립된 뒤 그의 유언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오늘날 헤르츨 산으로 알려진 예루살렘 서편 언덕에 안장되었다. 바젤에서 최초의 시온주의 대회가 열린 후 헤르츨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바젤 대회를 굳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공개적으로 밝힐 뜻은 없지만) '바젤에서 나는 유대인 국가를 세웠다'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을 지금 한다면 온세상 사람들이 다 웃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5년 안에, 또는 50년 안에는 틀림없이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유대인 국가는 2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헤르츨의 많은 지지자들이 노력해온 복합적인 역사의 산물이었지만, 역사의 사건을 이용할 줄 알았던 유대인들의 정치력을 조직화한 사람은 헤르츨이었다.

그는 자기 계획에 반대하는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배척당하긴 했지만, 그 인격의 힘으로 유대인 대중의 열광을 받았고 당대의 많은 정치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