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트

허스트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Randolph Hea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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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3. 4. 29, 샌프란시스코
사망 1951. 8. 14,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신문발행인.

미국 최대의 계열 신문사를 설립했으며, 그의 경영전략은 한동안 미국 언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허스트는 금광 소유주이자 캘리포니아 출신 연방상원의원(1886~91)을 지낸 조지 허스트의 외아들이었다. 청년시절 허스트는 하버드대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기도 했으나 결국 퇴학당하고 말았다. 1887년 허스트는 힘겹게 운영되고 있던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San Francisco Examiner〉의 경영을 맡게 되었는데, 이 신문은 1880년 그의 부친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매입했던 것이었다.

그는 이 신문에 개혁론자들이 주장하는 조사적인 보도기법과 강렬한 선정주의를 혼합하여 새로운 성격의 신문으로 재창조해 2년이 채 안 되어 흑자로 돌아서게 했다. 허스트는 이후 1895년 경영실적이 저조한 〈뉴욕 모닝 저널 Morning Journal〉을 매입하면서 뉴욕 시의 신문업계에 진출했다. 허스트는 스티븐 크레인, 줄리안 호손 같은 유능한 작가들을 기용했고, 컬러 연속만화의 창시자인 리처드 F. 아웃컬트와 같이 조지프 퓰리처가 가장 자랑으로 삼던 인재 가운데 상당수를 스카웃하는 등 퓰리처의 경쟁지 〈월드 World〉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뉴욕 모닝 저널〉(이후 〈뉴욕 저널 아메리칸 New York Journal-American〉으로 바뀜)은 판매가격을 1센트로 인하하면서 그림이나 컷을 많이 사용하고 컬러 기사란과 현란한 표제를 채택하는 한편, 범죄나 의사(擬似)과학에 관련된 선정적인 기사와 외신에 대한 호전적인 성격의 기사를 게재하여 곧 전례 없는 높은 발행부수를 기록하게 되었다. 허스트의 〈뉴욕 모닝 저널〉과 퓰리처의 〈월드〉는 계속해서 치열한 판매부수 경쟁을 벌이게 되었으며, 이 두 신문이 채택했던 선정적인 기사보도와 광적인 판촉전략으로 인해 저속한 판매전략을 표현하는 '옐로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뉴욕 모닝 저널〉은 1895년 베네수엘라와 영국령 기아나 사이에 일어난 국경분쟁을 놓고 영국을 극심하게 비난했으며, 또한 1897~98년에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도 전쟁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욕 모닝 저널〉은 왜곡되고 과장된 보도를 통해 미국 국민들의 반스페인 감정을 극도로 고조시켰고, 사실상 1898년의 미국-스페인 전쟁을 촉발시키는 데 일조했다. 허스트는 1896, 1900년의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지지했는데, 1900년 선거운동에서는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을 독점기업의 앞잡이라고 공격했다.

하원에서 소극적인 의정활동을 수행하던 중(1903~07) 1904년 반태머니파 후보 명단에 올라 민주당 대통령후보지명대회에서 커다란 지지를 받기도 했으며, 1905년 뉴욕 시장 선거에서 3,000표의 표차로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1906년 유권자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태머니파로 전향했음에도 불구하고(또는 전향사실 때문에)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 찰스 에번스 휴스에게 패했으며, 1909년에는 뉴욕 시장 선거에서도 참패했다.

정치적 야망을 이루지 못한 허스트는 계속해서 영국을 비방하고,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며, 국제연맹과 국제사법재판소를 중상했다.

1925년경 허스트는 몇 개의 잡지사를 포함하여 미국의 전지역에 신문사를 설립하거나 매입했다. 그는 또한 소설책을 출판하고 여배우 마리온 데이비스를 주연으로 한 영화도 제작했는데, 데이비스는 30년 이상 허스트의 정부였다. 1920년대에 허스트는 캘리포니아 주 샌시메온에 있는 9만 7,000㏊에 달하는 거대한 목장에 웅장한 성을 건설하고 자신이 유럽에서 사들인 골동품과 예술품 등 다양한 수집품으로 이 저택을 장식했다.

그의 재산이 최고에 달했던 1935년 허스트는 28개의 주요신문사와 18개의 잡지사를 비롯하여 몇 개의 라디오 방송국, 영화사, 통신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무절제한 낭비벽과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허스트의 재정상태는 곧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허스트는 경영상태가 부진한 신문사를 매각하거나 실적이 우수한 다른 계열 신문사에 합병시켜야만 했다. 1937년 허스트는 자신의 예술 수집품의 일부도 매각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1940년에는 그가 앞서 이룩했던 거대한 언론제국의 경영권도 잃고 말았다(라카사그란데). 허스트는 말년을 사실상 은둔하며 보냈다.

허스트의 전기는 1930년대에 출판되기 시작했다. 오손 웰스가 제작한 영화 〈시민 케인 Citizen Kane〉(1941)은 W. A. 스완버그가 쓴 〈시민 허스트 Citizen Hearst〉와 연관된 것으로, 영화 속의 주인공 찰스 포스터 케인은 사실상 허스트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