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캔자스

피의 캔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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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미국의 노예제 옹호론자와 폐지론자가 주민주권론이라는 원칙을 놓고 새로운 준주인 캔자스를 장악하기 위해 벌인 소규모의 내란(1854~59).

1854년 5월 30일에 제정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의 주창자들은 준주 자치정부에 관한 그 법의 조항들이 노예제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을 갈라놓았던 '광란의 급류'를 잠재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사태는 정반대로 진전되어 북부의 자유토지주의자들은 무장한 이민 단체를 결성해 캔자스로 이주했고, 노예제 지지자들도 미주리 주로부터 주경계를 넘어 몰려왔다. 양쪽이 각각 자경집단과 유격대를 결성했고, 노예제 폐지론자인 한 거주민의 살인사건을 계기로 터진 와카루사의 폭력사태(1855. 12)는 주지사가 개입하고서야 간신히 진정되었다.

'피의 캔자스'는 로렌스 약탈사건(1856. 5. 21)으로 본격화되었다. 노예제 옹호론자들은 '노예제 폐지론의 온상'인 로렌스 시를 분쇄하기 위해 그곳에 몰려 들어가서 호텔과 신문사를 불태우고 파괴했다. 그로부터 3일 후 존 브라운이 이끄는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포타와토미 학살로 보복했다. 두 집단이 서로 싸우고 마을을 점령하고 죄수들을 풀어주는 동안, 주 경계선 주위에는 주기적인 유혈사태가 계속되었다.

캔자스를 각각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예제 지지자들과 노예제 반대자들 사이에 벌어진 이러한 정치적 투쟁은 1857년에 제안된 르컴프턴 헌법에 집중되었다. 1861년 1월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하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피의 캔자스' 사태는 새로 결성된 공화당이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 내세운 노예제 폐지론이 더욱 호소력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이 분쟁으로 입은 손해에 대해 40만 달러의 배상요구가 제기되자 후에 지역위원회의 위원들은 이를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