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2세

비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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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05. 10. 18, 시에나 코르시냐노
사망 1464. 8. 14/15, 교황령 앙코나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교황(1458~64 재위).
본명은 Enea Silvio Piccolomini.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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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교황 시절
  4. 업적

개요

이탈리아의 유명한 인문주의자이며, 치밀한 정치가였다.

투르크족이 유럽 전체를 짓밟으려고 위협할 때 십자군을 일으켜 유럽을 통일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당대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서 방대한 글을 남겼다.

초기생애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는 이탈리아 시에나 근처에서 아주 몰락해가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열악한 환경에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추기경 도메니코 카프라니카의 비서 노릇을 했고, 그를 따라 바젤 공의회(1431~37)에 참석했는데, 이 공의회는 교회개혁에 관심이 있던 주교들의 회의로서, 이미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대립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추기경 니콜로 알베르가티와 함께 외교 임무를 맡아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했고, 1436년 바젤로 돌아오자마자 공의회의 임원이 되어 연설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줄 기회를 몇 번 가졌다.

공의회 장소를 페라라와 피렌체로 옮기라는 교황 에우제니오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바젤에 남아 있던 주교들이 1439년 11월 5일 대립교황 펠릭스 5세를 선출하자 그의 비서가 되었다.

바젤에 남은 참석자들의 대표로서 황제가 소집한 프랑크푸르트 제국의회에 참석하여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에게 주목을 받고, 빈으로 초청되어(1442) 계관시인 겸 프리드리히의 개인비서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1445년 대립교황과 관계를 끊고 그때까지 받아온 파문을 사면받았다.

전하는 바로는 그는 중병에 걸려 방탕한 생활을 청산했다고 한다(사생아를 여럿 낳았음). 프리드리히의 이름으로 그는 바젤 공의회와 교황의 피렌체 공의회 간의 대립을 제3의 공의회를 소집하여 끝내자고 제의했으나 에우제니오와 바젤의 주교들 모두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평신도였던 그는 1446년 몇몇 성직에 임명되었다. 그뒤 에우제니오가 독일 대주교 2명을 폐위함으로써 일어난 소동을 진정시켰고, 교황과 독일 제후들을 화해시켰으며, 프리드리히로 하여금 바젤 공의회를 지원하지 않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47년 새 교황 니콜라오 5세에 의해 트리에스테 주교로 임명된 뒤 자신이 바젤 공의회를 지지하다가 교황을 옹호하게 된 경위를 적은 '철회의 편지'를 써서 독일의 제후국들과 교황청 사이를 중재하는 데 성공했다.

1449년 시에나 교구로 옮긴 뒤 프리드리히 왕에게 포르투갈 공주를 중매하고, 로마에서 니콜라오 5세의 집전으로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1452)을 갖도록 주선했다. 아라곤 및 나폴리 왕 알폰소 5세와 평화를 중재하고, 그를 설득하여 당시 갈리스토가 투르크족에 맞서 일으키려고 열성을 다해 추진하던 십자군에 협력하도록 만든 공로로 니콜라오의 후임교황 갈리스토 3세(1455~58 재위)로부터 산타사비나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교황 시절

갈리스토가 죽자 에네아 실비오는 교황에 선출되어 비오 2세가 되었다(1458. 8. 19). 교황으로서의 그의 한 가지 목표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유럽을 약탈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투르크족을 물리치기 위해 대규모 십자군을 조직하는 것이었는데, 이 위험한 일을 연구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그리스도인 군주들을 만토바 회의에 소집했다.

예정된 회의 날짜인 1459년 6월 1일에 회의장에 도착해보니 비오 혼자밖에 없었고, 몇몇이 늦게 도착하기는 했으나 서로 이권을 놓고 말다툼을 벌일 뿐이었다.

끈기 있게 외교를 펼쳤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성공하기 위해서는 서방과 평화를 회복해야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비오가 교황령에 대한 통제권을 서서히 장악했다. 교회관할권에 관하여 프랑스를 교황청으로부터 대체로 독립하게 만든 '부르주 국본조서'(1438)을 철회하도록 프랑스와 몇 차례 협상을 벌였으나 왕 샤를 7세와는 타협을 보지 못했고, 그의 아들 루이 11세와 타협하는 데 성공했다(1461). 1460년 그리스인 추기경 베사리온을 독일로 보내 십자군에 동참하도록 홍보했으나 지역간의 불화와 전쟁 때문에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빈에서도 마찬가지로 실패하고 다음해 로마로 돌아왔으나 베네치아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티롤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보헤미아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세상이 불안해졌으나 몇몇 지역들에서 분쟁이 가라앉고 황제 프리드리히와 부르고뉴의 공작 선량공 필리프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데 힘입어 1463년 10월 자신이 직접 지휘할 십자군을 용감하게 선포했으나 그는 이미 병들어 있었다. 1464년 6월 18일 비오는 로마를 떠나 군대가 집결하기로 되어 있는 이탈리아 동부 아드리아 해 연안 안코나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8월 11일 베네치아에 함대 2척이 도착했으나, 8월 14~15일 밤 비오는 이교도가 장악하고 있는 동방을 응시한 채 안코나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성 베드로 대성전에 묻혔고, 이 대성당이 새로 건축되던 때 산 안드레아 델라 발레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업적

교황 비오 2세는 독일과 다른 나라들의 정세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대규모의 교회개혁 계획을 세웠으나, 당시의 정치 상황과 이권에 눈이 어두운 성직자들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며, 특히 수도회 안에서 회칙에 따라 엄격히 살라는 운동을 권장했다. 대체로 훌륭한 추기경들을 배출했으며, 1460년 1월 17일에는 탄원의 대상을 교황에게서 교회의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옮기는 것을 단죄했다. 자신이 직접 개입했던 사건들에 관해 많은 글을 남겼고, 일반 역사 및 지리에 관한 책과 시를 썼고, 천박한 소설(〈두 연인의 이야기 The Tale of Two Lovers〉)도 썼다.

교황으로서 인문주의자들을 후원했지만 재정을 남용하거나 그들의 도덕성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