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핀테른

프로핀테른

다른 표기 언어 Profintern

요약 노동조합이 사회의 정치변혁과 사회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적 색채를 띤 각국의 직업별·산업별 노동조합의 국제적 연맹조직.
정식 이름은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의 자매단체이다.

1919년 6월 제2인터내셔널에 의해 서유럽과 북유럽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국제노동조합연맹이 결성되자,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이 이에 대항하여 1921년 7월 3일 모스크바에서 42개국의 혁명적 노동조합 및 그룹·노동조합 내 소수파대표 380여 명이 참석한 프로핀테른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노동자들의 생산관리를 경제투쟁의 중심임무로 제기하고, 자본주의 타도, 혁명적 수단에 의해 사회주의로의 이행,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 등을 긍극적 목표로 제기했다. 또한 제2인터내셔널에 대해 격렬한 폭로와 선동을 지속할 것을 주장했다.

프로핀테른 제2회 대회(1922. 11. 19)는 혁명적 생디칼리슴 계열의 노동자조직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공장·경영위원회의 창설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지시했다. 제3회 대회(1924. 7. 8)는 노동운동 내의 개량주의에 대한 투쟁을 제기하면서, 제2인터내셔널 산하 노동조합들과의 통일전선운동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고, 8시간 노동일을 위한 투쟁, 파업전략, 여성·농민 사이에서의 활동, 협동조합에서의 활동, 식민지·반식민지국가들에서의 프로핀테른의 임무 등을 의제로 상정했다. 제4회 대회(1928. 3. 17)는 좌편향적인 '계급 대 계급' 전술노선에 입각하여 제2인터내셔널 및 그 산하 노동조합과의 통일전선결성 모색을 포기하고 그에 대한 투쟁의 강화, 독자적인 경제 투쟁의 전개가 강조되었고, 혁명적 부분으로 새로운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미조직 대중을 획득할 것을 결의했다. 제5회 대회(1930. 8. 15)는 세계 경제 대공황에 따른 세계정세의 변동을 대단히 혁명적인 상황으로 진단하고 좌편향적 노선을 더욱 강화하여 통일전선운동을 포기하고 경제투쟁을 독자적으로 지도할 것, 기존 노동조합 내에서 혁명적 반대파를 강화하여 혁명적 노동조합을 창설할 것, 제2인터내셔널을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투쟁에 집중할 것 등의 대단히 편협한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제5회 대회의 좌편향적 정책의 결과에 따라 프로핀테른과 그 산하 노동조합들은 노동자대중 속에서 고립되어갔고, 파시즘의 탄압하에서 몰락했다. 1935년 7월의 코민테른 제7회 대회에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인민전선방침이 채택되자, 1936년 3월 프로핀테른 계열의 통일노동총동맹과 제2인터내셔널 계열의 노동총동맹이 합동대회를 개최했다. 그밖에도 각 국 노동조합들간의 통일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나, 각 국의 통일운동과정에서 프로핀테른의 존재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에 새로이 통일된 국제노동조직의 창설을 주장하는 가운데 1937년 12월 해산되었다.

프로핀테른과 한국

한국의 노동운동이 프로핀테른과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927년 5월 20일 제1회 범태평양노동조합회의가 개최되어 범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가 창립되면서부터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조봉암(曺奉岩)이 참석하여 비서부의 일원이 되었다.이후 프로핀테른 제4회 대회에서 조선노동총동맹의 강화를 주장하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제5회 대회 직후인 1930년 9월 18일 집행위원회에서 '조선에서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임무'에 대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결의는 조선노동운동의 현상과 임무를 지적하고 있는데, 당시 '계급 대 계급전술', '사회파시즘'론에 입각하여 신간회를 민족개량주의 조직으로 규정짓고, 〈조선일보〉와 천도교 세력을 비난했다. 이 결의는 일명 '9월 테제'라고 불리며, 1931년 5월의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해소결정 등 당시 한국의 공산주의운동과 노동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31년 10월에는 범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에서 '10월서신'으로 불리는 결정을 발표했다. 10월서신은 9월 테제와 같은 맥락의 지시문인데, 종래의 파벌투쟁을 청산하고 노동대중 속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이를 기초로 1928년 해산된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도모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범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의 직접 지도 아래 함경남도 흥남의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1930년부터 전개되었다.

일명 태평양노동조합사건으로 표출된 이 움직임들은 김호반·강진·박세영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검거된 관계자만 해도 193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4차례에 걸쳐 1,000여 명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