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해밀턴

윌리엄 해밀턴

다른 표기 언어 해밀턴 , Sir William Rowan Hamilton
요약 테이블
출생 1805. 8. 3/4, 더블린
사망 1865. 9. 2, 더블린
국적 아일랜드

요약 아일랜드의 수학자·천문학자.

대수학 역사에서 두드러진 특색을 이룬 4원수론(四元數論)을 발달시켰고 원뿔 굴절현상을 발견했다.

동역학과 광학을 통합하여 수리물리학에 길이 남을 영향을 주었으나 양자역학이 발달하고서야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았다.

동시대의 영국인 T.B 매콜리와 J.S. 밀처럼 해밀턴도 어릴 때 비상한 재능을 나타냈다. 그의 부모는 3세 전에 그를 더블린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인 트림의 영국학교 교회의 박식한 목사이며 교장인 삼촌 제임스에게 보냈다. 그는 1823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트림에 도착한 지 몇 개월도 안 되어 영어를 쉽게 읽었고 산수를 잘했다. 5세 때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를 번역했고 호메로스·밀턴·드라이든을 암송했다. 12세 전에 고대 시리아어 문법을 편찬했고, 14세에는 페르시아어를 통달해 더블린을 방문한 페르시아 대사에게 보낼 환영 인사말을 작성했다.

`éments d'algèbre〉와 I. 뉴턴의 〈프린키피아 Principia〉를 읽은 뒤, 해밀턴은 16세 때 라플라스의 〈천체역학 Traité de mécanique céleste〉(5권, 1798~1827)에 몰두하게 되었다.

라플라스의 추론에서 미비한 면을 조사해 트리니티 칼리지의 천문학교수 J. 브링클리의 주목을 받게되었다. 17세 때 그는 당시 아일랜드 왕립 아카데미 회장이던 브링클리에게 기하광학에 대한 논문 원본을 보냈다. 브링클리는 논문을 아일랜드 왕립 아카데미에 보내면서 "이 젊은이는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 현재 이 시대 최고의 수학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823년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고 고전과 수학에서 수석을 했다.

한편 광학연구를 계속해서 1827년 4월 아일랜드 왕립 아카데미에 〈광선계 이론 Theory of Systems of Rays〉을 제출했다. 이 논문은 기하광학 분야의 모든 문제를 하나의 통합된 방법으로 풀어 기하광학을 새로운 수리과학으로 바꾸어놓았다. 해밀턴은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의 원리(빛은 그 경로가 직선이든지 반사로 굽든지 간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갈 때는 최단시간의 길을 택함)로부터 출발했다.

해밀턴의 착상의 핵심은 시간(또는 '작용')을 빛이 통과하는 두 끝 지점 사이의 함수로 생각하고, 두 끝점 좌표가 변하면 그가 말하는 작용의 변화법칙에 따라 시간도 변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광선계의 전체 이론이 이 특성함수의 연구로 귀착될 수 있음을 보였다. 해밀턴은 이 논문을 제출한 뒤, 아직 대학생이었지만 주교가 된 브링클리의 뒤를 이어 트리니티 칼리지의 천문학 앤드루좌(座) 교수 및 아일랜드 왕실 천문학자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22세도 되지 않은 학부생이 직권에 의해 수학 주교법률상(Bishop Law Prize)에 응시하는 대학원생들의 시험관이 되었다.

선출인들의 목적은 해밀턴에게 수업부담이 많지 않은 연구직책을 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는 1827년 10월 더블린에서 8㎞ 떨어진 던싱크 천문대 근처에 거처를 정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관측에서는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천문학강의에서 많은 수강생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평생 동안 문학에 매력을 느껴서 시인 워즈워스를 자신의 친구로 여겼는데, 워즈워스는 그에게 시보다는 수학을 연구하라고 충고했다.

던싱크로 옮기고 6년 후 그는 카운티 티퍼레리 지방의 전 교구 목사의 딸 마리아 베일리와 결혼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그는 가정을 잘 이끌어나가지 못한 아내로 인해 규칙적인 식사를 하지 못했으며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 그는 대개 하루 종일 식당에서 연구하곤 했으며, 요리사는 그에게 가끔 양고기 토막을 주곤 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논문집 사이에 낀 접시에서 다수의 뼈들이 발견되었다. 1835년 더블린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회의의 지역조직 총책이 되었고 폐회연에서 주지사인 아일랜드 총독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2년 뒤 그는 아일랜드 왕립 아카데미의 회장이 되었다. 1843년 영국 정부로부터 매년 생활연금 200파운드를 받게 되었다. 말년에 통풍으로 투병하는 동안 그는 새로 구성된 미국 국립아카데미에 의해 선출된 외국인협회의 목록에 그의 이름이 맨 먼저 올랐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해밀턴의 업적

1832년 해밀턴 광선이론의 보충판이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론의 결과로서 쌍축결정들에서의 빛의 굴절과 관련해서 빛이 이러한 결정을 통과할 때 전혀 예기치 못한 현상으로, 동심원들로 이루어진 2개의 간섭무늬가 나타난다고 예견했다. 따라서 한동안 황옥 같은 이러한 종류의 결정은 각 입사광선에 대해 2개의 굴절광선을 만든다고 알려졌다. 이 복굴절이론은 A.프레넬이 몇 년 앞서 연구했었다. 해밀턴은 그의 일반적인 방법으로 어떤 조건 아래에서는 입사광의 단일광선이 쌍축결정에서 실제로 무한개의 굴절광선을 만들며 원뿔 모양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냈다.

해밀턴의 업적 중 광학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간주되는 원뿔굴절은 2개월 후에 그의 동료 H. 로이드의 실험에 의해 입증되었다.

오늘날 그의 광학과 역학의 통합은 원뿔굴절의 업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1835년 그의 논문 〈동역학의 일반적 방법에 관하여 On a General Method in Dynamics〉가 출판되었다. 이 논문에서 물체의 운동에 대해 특성함수를 적용했으며, 역학계의 운동량의 성분들과 그 계의 위치를 결정하는 좌표 사이의 쌍대성을 나타내는 형태로 운동방정식을 만들었다.

이 쌍대성을 표현한 정준방정식(正準方程式)과 역학 전체를 변분법(變分法)의 문제로 축소시킨 그의 원칙은 역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오랫동안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가 발견한 쌍대성의 중요성은 100년이 지나서야 양자역학의 출현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같은 해에 해밀턴은 그의 유명한 4원수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4개의 수를 나열한 순서쌍들로 특정한 상동·덧셈·곱셈 법칙을 만족하고 3차원 공간에서 크기와 방향을 가진 양을 다루는 데 유용하다.

이는 인수(因數)의 순서나 수열은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아서 대수를 곱셉의 교환공준으로부터 자유롭게 했기 때문에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대수학에 대한 그의 연구는 10년 전, 기본양은 하나의 수가 아니고 수의 순서쌍이라는 대수적 수의 쌍에 대한 선구적인 논문을 발표했을 때 시작되었다. 해밀턴은 이 이론을 이용해 -1의 제곱근과 관련한 복소수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논문의 뛰어난 점은 대수학을 기하학처럼 공리를 기초로 하여 시도한 점이다. 복소수(a+bi 형태의 수, i=√-1) 기하학은 평면에서 2차원 벡터로 된 기하학이다.

3차원 공간에 대해서도 유사한 방법을 전개하려고 시도했으나 그의 생각은 3중항에 제한하는 한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몇 년 동안 지연되었다. 1843년 10월 16일 로열 운하를 따라 더블린으로 걷는 도중에 3차원 공간에서 기하학적 연산은 3중항이 아니라 4원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4원수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대수쌍이 승수(乘數)와 각에 대등하기 때문에 평면에서는 충분한 반면, 3차원에서는 평면 그 자체의 방향이 변하므로 2개의 수를 추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발견에 너무 흥분한 해밀턴은 브룸 다리를 지나면서 석조물 위에 4원수 기본공식 (i2=j2=k2=ijk=-1)을 새겼다.

해밀턴의 발견은 ab=ba라는 곱셉의 교환법칙을 포기해야 하므로 관습을 깨는 것이었다.

그는 생애의 나머지 22년을 4원수와 그 응용에 바쳤다. 이 연구는 1866년 사후에 〈4원수의 기초 The Elements of Quaternions〉로 출판되었다. 해밀턴은 4원수가 응용수학에서 문제해결에 이상적이라고 믿었으나 불행하게도 수리물리학자들은 벡터 해석학으로 유명한 J.W. 깁스의 단순한 형을 택했다. 해밀턴의 발견의 진가는 오히려 순수수학에 있는데, 이를 통해 근대 추상 대수학이 발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