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티오스

포티오스

다른 표기 언어 Saint Photius
요약 테이블
출생 820경,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사망 891(?). 2. 6, 아르메니아 보르디
국적 콘스탄티노플

요약 10세기경에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2월 6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858~867, 877~886 재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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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배경과 초기경력
  3.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4. 필리오퀘 논쟁

개요

로마에 대항해 동방교회의 자치권을 지켰고, 9세기 비잔티움 문예부흥을 이끈 주요인물이다.

배경과 초기경력

부계로는 784~806년 총대주교를 지낸 관리 타라시우스와, 모계로는 여제 테오도라와 842~866년 권좌 배후에서 실력을 행사한 여제의 남동생 바르다스와 친척이었다.

이 두 가문은 제대로 교육받은 관리들을 기용함으로써, 정부의 비용을 줄이기를 바라던 일부 군대 장교들, 그리고 관료들의 세속적 지혜를 믿지 않는 수사들과 긴장상태에 있었다. 그리스도교 예배의식에서 그림(성상)의 위상을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지식인 관료들은 군대의 지지를 받던 성상파괴주의자들을 배척했다. 그러나 787년 성상이 다시 등장하고 843년 논쟁이 다시 시작되자 관료들은 이전의 성상파괴주의자들을 관대하게 대했으나 수사들, 특히 스투디온의 성 요한 수도원 소속 스투디오스회 수사들은 이들을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하여 모든 주요지위에서 쫓아내려고 했다.

포티오스의 부모는 그가 어릴 적에 성상파괴론자들이 주도한 공의회에서 단죄당한 뒤 그를 데리고 유배생활을 했다.

부모가 죽은 뒤 테오도라의 섭정 초기(842~856)에 포티오스는 유명한 교사가 되었고,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의학과 과학 서적들을 포함한 고전문학과 그리스도교 산문문학을 정기적으로 강독했다. 관료가 되기 위해 학교를 떠난 뒤에도 강독을 계속하면서 요약한 내용들을 토대로 270개 이상의 항목을 지닌 그리스 산문문학 요약집 〈Myriobiblon〉, 또는 〈총서 Bibliotheca〉를 썼다.

이 책은 외교 임무를 띠고 이슬람 세계에 갔을 때 쓰기 시작하여, 867년 이후 공직생활에서 잠시 은퇴한 기간 동안 완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855년 이전에 국무대신이 된 듯하며, 모든 성직을 두루 거친 뒤 858년 바르다스와 함께 몰락한 완고한 이냐시오스를 대신하여 성탄절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되었다.

이냐시오스의 폐위는 관료가 총대주교가 되는 것을 반대한 스투디오스회를 비롯한 수사들뿐만 아니라, 신학과 비잔티움 문화를 교육받은 평신도들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은 교황 니콜라오 1세까지도 불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포티오스는 성상파괴 논쟁 동안 로마에서 비잔티움 총대주교구로 소속이 바뀐 교구들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하여 교황을 더욱 자극했다.

이 교구들의 중요성은 대표적인 슬라브 민족들(모라비아·크로아티아·불가리아)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더욱 커졌으며, 관할권상 이들은 로마에 속할 수도 있었고, 비잔티움 총대주교구에 속할 수도 있었다. 로마·독일·비잔티움 선교사들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하자, 포티오스는 불가리아에서 활동하는 라틴 선교사들이 벌이는 신학과 전례를 비롯한 여러 개혁들에 불만을 표시하는 회칙을 동방의 다른 총대주교들에게 보냈다. 867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한 공의회에서 그는 자신을 합법적인 총대주교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여 '포티오스 분열'을 일으키고, 다른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자신을 서방교회의 영원한 적으로 묘사한 니콜라오 1세를 단죄하고 파문했다.

그러나 이무렵 포티오스의 지위는 바르다스의 몰락으로 약화되어 있었고, 마케도니아 사람 바실리우스가 황제 미카일 3세를 살해한 데 항의하자 867년 가을에 폐위당하고 대신에 이냐시오스가 다시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 직전에 로마에서 니콜라오 1세를 계승한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의견차이를 조정할 계획을 세우고서, 869~87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공의회에 사절들을 파견해 조건을 제시했으나, 대다수 콘스탄티노플 성직자들은 그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냐시오스는 870년 독자적으로 불가리아 주교들을 축성했다.

그러나 포티오스의 친구들 도움 없이는 동방과 서방 사이의 긴장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었고, 비잔티움 정교회 내부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없었다.

876년 이전 포티오스는 왕궁으로 돌아가 황제 가문 왕자들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877(또는 878)년 이냐시오스가 죽자 다시 총대주교가 되었다. 처음 총대주교가 되었을 때처럼 일부 수사들이 반발했지만, 이번에는 로마의 지지를 받았다. 교황 요한 8세가 이탈리아 해안에 출몰하던 무어인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비잔티움 해군의 지원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879~880년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소피아 교회에서 열린 새로운 공의회에 사절을 보냈고, 여기서 이루어진 합의에 따라 불가리아는 로마 총대주교구에 속하되 그리스 주교들을 계속 유임시킴으로써 동방과 맺은 문화적인 관계가 보장되었다. 불가리아는 곧 중심지가 되었고, 마케도니아계 슬라브족의 언어로 작성된 비잔티움 전례서는 다른 슬라브어권 지역으로 퍼졌다.

필리오퀘 논쟁

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의 관할권 내에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지역 내의 그리스 교구들에게 자신의 요구를 강요하지 않았고, 로마 교황사절들은 서방에서 니케아 신조에 내용을 덧붙이는 행위들을 단죄해달라는 비잔티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쟁점이 되었던 '필리오쿠에'(라틴어로 '그리고 성자'라는 뜻)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없었는데, 당시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성부와 '그리고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 구절을 니케아 신조에 삽입한 것은 스페인에서 시작되어 프랑크족에게 퍼졌으나, 로마에서는 아직 이 구절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포티오스는 라틴어 실력이 짧았고, '필리오쿠에' 논쟁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나, 훗날 2번째 총대주교 재위기간이나 그 이후에 완성한 〈성령의 사제 The Mystagogia of the Holy Spirit〉라는 책에서는 이 문제를 좀더 이해하고 있다.

요한 8세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과거에 이룬 합의를 거의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결국 기만으로 파악하고 거부했다. 요한 8세는 882년에 살해당했으며,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교황 자리에 오른 계승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듯하다. 886년 포티오스는 요한뿐만 아니라 하드리아누스 3세(884~885 재위) 및 스테파누스 5세와도 교제를 했고, 그해 자신의 제자가 황제 레오 6세로 즉위할 때 총대주교직을 사임했다.

교황은 황제가 다른 제자인 스테파누스 왕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사직을 강요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포티오스의 나이가 80세가 넘는 것을 감안하면 자의로 사직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