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오 1세

니콜라오 1세

다른 표기 언어 Nicolaus I
요약 테이블
출생 819(~822경), 로마
사망 867. 11. 13,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축일은 11월 13일. 교황(858~867 재위).
(영). Saint Nicholas I. 별칭은 Nicholas The Great.

교황권을 옹호한 중요 이론가로서 중세 초기의 교황들 가운데 가장 강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그의 교황직은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1세기에 개혁을 추구한 교황들에게 길을 마련해주었다. 교황청에서 거의 15년을 봉직한 뒤 858년 4월에 교황 베네딕토 3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 봉직중 역사적으로 중요한 3차례의 투쟁을 치렀다.

니콜라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성 이냐시오스를 지지했는데, 비잔티움 황제 미카엘 3세는 이냐시오스를 부당하게 모욕하고 폐위시킨 뒤 교회법을 거스르면서 학자 포티오스를 총대주교로 앉혔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니콜라오는 사절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으나, 861년 사절이 이냐시오스에게 내려진 판정을 추인하자 그들과의 관계를 부인했다. 862년 유배당한 이냐시오스로부터 전갈을 받고 사건의 정황을 검토한 뒤 이냐시오스를 지지하고 포티오스를 파문했는데(863), 이에 맞서 포티오스도 867년에 교황의 폐위를 선언했다.

이 사건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갈라놓은 '포티오스 분열'(Photian Schism)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나, 니콜라오는 이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

니콜라오가 치른 2번째 투쟁의 상대는 로렌의 왕 로테르였다. 로테르는 부인 테우트베르가에게 근친상간의 거짓 혐의를 씌워 이혼하려고 했다. 이에 테우트베르가는 니콜라오에게 호소했지만, 862년 4월 아헨에서 열린 교회회의는 로테르의 재혼을 승인했다.

863년 메츠에서 열린 교회 회의에서 로테르는 아헨 교회회의의 결정을 확인받았는데, 니콜라오의 사절인 콜로뉴의 대주교 귄터와 트리어(트레비스)의 대주교 테우트가우드에게 뇌물을 주어 그 확인을 받아낸 것 같다. 이들 사절들이 메츠 교회회의의 부당한 결정을 가지고 로마로 왔을 때, 니콜라오는 로테르를 자기 교권에 종속된 사람으로 취급하여 테우트베르가에 대한 모든 이혼소송을 취소하고, 그 2명의 대주교를 폐위시키는 선례를 남겼다.

니콜라오 때의 3번째 중대한 교회 문제는 862년 랭스의 대주교 힝크마르가 수아송의 주교 로타드 2세를 폐위시킴으로써 생겼다.

이 사건은 주교가 상급 성직자인 수도대주교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로마에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고전적 사례가 되었다. 로마의 사법적 우위권을 엄격하게 고집한 니콜라오가 그 사건을 조사하도록 명령한 결과 865년 로타드는 복직이 되었는데, 이때 최초로 위조 교령집(False Decretals)을 사용했던 것 같다.

그 교령집은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위조된 문서로서, 세력 확대를 꾀하는 대주교들의 월권행위에 대해 주교들의 독립을 옹호하고 있었다.

니콜라오에게 있어 로마 교황청은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머리이자 원형이었다. 그는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을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교황청이 지니는 성직 및 왕권 기능들은 그리스도가 성 베드로에게 수여한 유산이며, 황제에게 부여된 세속 권력은 교회 보호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교회 문제에 대해 카롤링거 왕조가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데 반발했으며,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에 대한 법률제정권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교황에 의한 신정정치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교황이 결정하는 것을 준수해야 한다고 선언하여 서방교회 교구들에 대한 로마의 수위권 확립을 도왔다. 1901년 M. 메이틀랜드가 J. 로이의 〈성 니콜라오 1세〉를 영역한 책이 출판되었고, 1920년 E. 페렐의 〈교황 니콜라오 1세와 아나스타시우스의 전집 Papst Nikolaus I und Anastasius Bibliothekarius〉이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