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펜

윌리엄 펜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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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44. 10. 14, 런던
사망 1718. 7. 30, 잉글랜드 버킹엄셔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퀘이커교 지도자, 종교의 자유 옹호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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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교육
  3. 퀘이커교 지도와 정치활동
  4. 펜실베이니아 설립과 통치
  5. 말년

개요

윌리엄 펜은 퀘이커교도들, 다른 비국교도, 유럽의 소수 종파들을 위한 도피처로서의 아메리카 펜실베이니아 연방의 설립을 감독했으며 그곳을 2차례 방문했다(1682~84, 1699~1701).

초기생애와 교육

해군장성인 윌리엄 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윌리엄 펜이 12세 때까지 거의 바다에 나가 있었다. 어머니 마르가레테(결혼 전 성은 야스퍼) 판 데르 슈렌 펜은 자식 없는 과부였는데, 1644년 나이 많은 펜과 혼인해 장남 펜 외에도 1652년 마거릿, 1656년 리처드를 낳았다. 이 가족은 런던에서 살다가 펜이 3세 때 천연두를 심하게 앓고 난 직후 유명한 그래머 스쿨이 있는 에식스의 치그웰 마을 근처 시골로 이사했다. 펜은 6~12세에 하루 8~10시간씩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해 고전 교육의 기초를 쌓았다.

과거에 대한 강렬한 의식은 청년시절에 안정감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안정된 생활은 1655년 아버지 펜이 서인도제도에서 벌인 해전에서 패배해 잠시 런던 탑에 갇힘으로써 흔들렸다. 이 일로 가족은 런던으로 되돌아갔고, 정치적 불안이 그치지 않자 다음해 아일랜드로 이사했다.

아일랜드에서는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4년을 지냈다.

이때는 많은 토지를 갖고 있던 아버지와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1660년 스튜어트 왕조의 왕정복고 때 아버지는 기사작위를 받고 해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공부할 준비가 잘 되어 있던 윌리엄 펜은 그해 옥스퍼드대학교에 입학했고, 이 학교의 성공회 형식주의를 배척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과시했다. 예배시간에 참석하기를 거부해 처벌을 받았고, 2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이러한 행동에 격분한 아버지는 아들의 광신을 막기 위해 18세 된 펜을 유럽으로 보내 두루 여행하도록 한 뒤, 프랑스 소뮈르에 있는 프로테스탄트계 대학에 입학시켜 학업을 마치게 했다.

아버지의 의도는 고위관료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데 있었으나, 윌리엄 펜은 소뮈르에서 보낸 2년을 거의 신학공부에 바쳤다.

그뒤 영국으로 불려가 링컨 칼리지에 입학해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1년간 법학을 공부했으나 1666년초 런던에 퍼진 전염병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다. 윌리엄 펜은 짧은 법률 지식을 사용해 아일랜드에 있는 가족 영지를 관리했다. 21세에 법학을 계속하라는 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였으나, 이때 우연히 토머스 로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코크에서 열린 집회에서 윌리엄 펜은 로에가 "세상을 이기는 믿음도 있고, 세상에게 지는 믿음도 있다"는 주제로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이때부터 펜은 기성사회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국가로부터 박해를 당하던 급진적인 종파에 가입했다.

퀘이커교 지도와 정치활동

세상을 의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몰두해 있던 초기 퀘이커교도들은 주저하지 않고 진리를 전도했다.

윌리엄 펜도 같은 정신으로 이 종파에 가담했고, 자기 신앙을 말과 인쇄물로 공개적으로 진술했다는 이유로 4차례에 걸쳐 감옥에 갇혔다. 개종한 지 7년 만에 42권의 저서와 소책자들을 펴냈는데, 이 가운데는 1669년 런던 탑에서 자기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쓴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No Cross No Crown〉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아버지의 지위 덕분에 석방될 수 있었는데도 어려운 감옥살이를 견뎌낸 일과 유럽에 대한 선교 노력으로 다른 퀘이커교도들에게 신임을 얻었으며, 이 운동의 성격이 변해가던 시기에 점차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종교적 관용).

프렌드회 창시자 조지 폭스는 국가의 박해에 대응하여 교도들에게 지나치게 급진적인 표현을 삼가해 정부에게 빌미를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윌리엄 펜이 이 프렌드회의 변화에 이바지한 점은 자신의 사회 사상과 활동의 근본 원칙인 양심의 자유를 끊임없이 주장한 데 있다. 이러한 자유는 국가가 비국교도들을 관용하는 정책을 펴야만 비로소 실현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관용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리가 여러 개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셈도 되었다. 따라서 폭스와 펜 두 사람은 퀘이커교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양보하고 있었다.

윌리엄 펜의 열정적인 태도가 온건하게 바뀐 것은 실용적인 기질뿐만 아니라 개인생활의 변화도 반영하는 것이었다.

윌리엄 펜은 폭넓은 학문을 했으나, 그가 세우는 학설은 거의 언제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변이었다. 종교관용에 관한 견해도 철학 논문이 아닌 틈틈이 쓴 소책자들을 통해서 제시했다. 그 예로 〈윌리엄 펜과 윌리엄 미드 재판에서 주장된 민중이 관례로 누려온 정당한 자유들 The People's Ancient and Just Liberties Asserted, in the Trial of William Penn and William Meade〉(1670)이 있는데, 이것은 영국 법률 역사상 이정표가 된 소송 사건에서 펜이 배심원의 독립을 옹호한 내용이다.

또한 윌리엄 펜은 1670년 아버지의 죽음과 1673년 동생 리처드의 죽음, 걸릴머 스프링겟과 혼인해(1672) 낳은 8명의 자녀 가운데 4명을 유아 때에 잃는 등 슬프고 숙연한 경험을 했다. 중년에 접어들어서는 천년왕국론자들보다 더 온건하게 되어 체제 안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만족했으며, 그결과 불가피하게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윌리엄 펜의 저서 〈새 의회에 대한 영국의 관심 England's Great Interest in the Choice of this New Parliament〉(1679)은 휘그당의 정책에 대한 최초의 명백한 진술서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들 가운데는 토리당 지도자들과 왕(찰스 2세), 왕의 동생 요크 공(후의 제임스 2세)이 있었다.

펜실베이니아 설립과 통치

프렌드회 안에는 윌리엄 펜이 벌이고 있는 세속적인 투쟁에 분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이 많은 퀘이커교도들은 그의 정책을 방해했다.

게다가 토리당이 재기하고 휘그당이 수그러들자 윌리엄 펜이 어설프게 정치에 개입한 일이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좌절한 펜은 자신의 정치 및 종교 원칙들을 제도화하기 위해서 아메리카로 눈을 돌렸다. 1655년 이래 퀘이커교도들은 대서양 건너편에도 전도를 하고 있었다. 1674년 퀘이커교도 2명이 뉴저지 서부를 소유하게 되었으나 결국 소유권 분쟁이 생겨 펜에게 중재 요청을 해왔다.

단일 소유권의 장점을 확신한 윌리엄 펜은 국왕에게 신세계의 토지를 양도해 줄 것을 요청했고, 친한 고관들의 힘을 빌어 자신을 최고 통치자로 임명한 토지양도증서를 통해 펜실베이니아를 얻었다. 펜은 이러한 특권을 모두 다 주장하지는 않았다.

휘그당의 조언과 자유파 퀘이커교도들(이들은 행정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강력한 대중 입법과 정치적 보수파를 설득해 재정지원을 받아낼 필요를 주장함)의 조언 사이에서 윌리엄 펜은 공화제 형태를 구성했다. 권력은 통치자와 그 휘하의 협의회에 집중되었으나 펜은 양심의 자유를 보장했고, 자유민에 대해서는 그들이 선택할 경우 체제를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펜실베이니아에서는 윌리엄 펜이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폭넓은 정치갈등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퀘이커교도들이 입법권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에서 소요가 발생하자 영국 관리들은 전부터 참전(參戰)과 선서를 거부하던 퀘이커교도들의 독특한 행위를 의심스럽게 지켜보아오던 터에 이 사태를 주목했다. 윌리엄 펜은 식민지 통치자로서 지역 퀘이커교도들의 요구와 본국 정부의 위협 사이에서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본국 정부의 위협적인 태도가 식민지 자치권에 좀더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윌리엄 펜은 대부분의 시간을 영국에서 보내야 했고, 펜실베이니아에서는 4년도 채 못 살았다.

펜실베이니아 첫 방문(1682~84)은 메릴랜드와 국경 분쟁 때문에 단축되었고, 윌리엄 펜은 곧 런던으로 돌아가 이 분쟁을 유리하게 조정했다. 이때는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라 형이자 전임 왕의 절대주의 정책들을 빠른 속도로 추진하기 시작하던 때였는데, 펜은 펜실베이니아가 뉴잉글랜드 자치령에 예속되는 것을 우려했지만 왕이 신앙의 자유를 지지한다고 언명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제임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왕정이 혁명으로 돌연히 끝나자 왕정에 연루되었다. 따라서 1689년 의회가 권력을 차지하고 법령으로 종교관용이 확립된 때 윌리엄 펜은 식민지 통치자의 직위를 잃었다(관용법). 1692~94년 펜실베이니아는 주로 퀘이커교도들이 식민지 전쟁에 협조하지 않은 이유로 잠시 왕의 지배를 받았다.

1690년대 중반 윌리엄 펜이 은거생활을 마치고 정치동맹을 재조직하기 시작했을 때는 왕과 의회가 다같이 왕의 식민지정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이미 개인이나 회사에게 양도한 독점 식민지의 자치권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1696년 윌리엄 펜은 새 식민지 구상을 구체화한 항해조례가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앞장섬으로써 이 식민지들의 독립유지를 위한 대변인으로 떠올랐다. 펜이 속한 펜실베이니아 식민지는 상업과 전략 면에서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특히 주목을 끌었고 공격당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 영주식민지).

말년

윌리엄 펜이 처한 상황에 무관심했던 그 지역 퀘이커교도들은 그가 2번째 펜실베이니아 방문(1699~1701) 때 특허장으로 그 식민지 의회에 높은 지위를 부여해주었는데도 계속 행정권을 요구했다.

이러한 배은망덕한 태도에 실망한데다 자신의 재산관리인이 수천 파운드를 횡령한 사실을 알고서 충격을 받고, 또한 장남 윌리엄 펜 2세의 퀘이커교도답지 않은 행위에 실망한 나머지 1702년 이 '거룩한 실험지'를 보호하는 동시에 매각하려는 협상을 시작했다. 윌리엄 펜은 1712년 매매협정을 마무리하기 직전 중풍에 걸려 6년 동안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불쌍한 처지로 지내다가 죽었다.

펜실베이니아는 윌리엄 펜의 빚 때문에 신탁(信託)되다가, 첫번째 아내가 죽고 2년 뒤인 1696년에 결혼한 아내 해너 칼로힐 펜에게 넘어갔다. 18세기에 펜실베이니아는 펜의 공화제와 종교관용 원칙들이 늦게 꽃피어 이루어진 의회의 단원제(單院制)와 문화의 다양성으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