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로스

키릴로스

다른 표기 언어 키릴루스 , Saint Kýrillos of Alexandria
요약 테이블
출생 375경
사망 444. 6. 27

요약 서방교회 축일은 6월 27일, 동방교회 축일은 6월 9일. 5세기 교리분쟁이 심한 시기에 활동한 그리스도교 신학자·주교.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해 이단적 견해를 주장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1882년 교회 박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412년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주교인 삼촌 테오필로스를 이어 주교가 되었다.

정통신앙을 열렬히 옹호하여 세속 정부와 충돌하게 되었으며 노바티아누스파 교회들을 폐쇄했는데, 노바티아누스파는 그리스도교 박해기간중에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던 사람들을 사면하는 교회의 권한을 무시한 분파주의자들이었다. 또한 그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도들을 공격하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일에 관여했다. 반란이 계속 일어나자 직접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반란을 막는 데 한 일이 없어 세속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집트의 일등 시민권을 갖고 있었으므로 네스토리우스파와 투쟁할 때 종교지도자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의 역할도 했다. 이 투쟁은 교리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집트인들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었다. 종교적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그리스도 양성론).

키릴루스는 한 위격 안에서 두 본성이 통일되어 있음을 주장했지만, 네스토리우스는 두 본성의 차이를 강조하여 그리스도를 상호제휴하고 있는 두 위격으로 분열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논쟁은 키릴루스가 성육신을 통해 두 본성이 내적 통일을 이루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그리스어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로 부를 것을 주장하면서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네스토리우스가 이 용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자 에페소스 공의회(431)가 열리게 되었다.

그 자신과 교황 첼레스티노 1세를 대변하는 위원회를 결성하여 대비한 키릴루스는 에페소스 공의회를 소집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했다. 키릴루스는 동방 주교들, 특히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가 되기 전에 살았던 안티오키아 교구의 주교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나중에 도착한 그들은 공의회를 다시 소집해 키릴루스를 정죄했다. 그러나 교황은 결국 키릴루스의 공의회를 인정했고,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몰아 추방했다. 그렇게 했어도 분쟁은 계속되어, 키릴루스가 안티오키아와 타협해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 두 본성의 차이를 강조한 신경을 받아들인 433년에 비로소 교회의 평화가 회복되었다.

키릴루스의 글로는 〈구약성서〉의 처음 5권 및 〈이사야〉·〈요한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에서 선택한 구절들에 대한 주석 이외에, 로마의 황제 배교자 율리아누스(361~363 재위)의 〈갈릴리 사람들을 논박함 Against the Galileans〉에 대한 답변이 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도로 양육되었으나, 황제가 된 뒤 이교도가 되었다. 이교에 대한 고대 그리스도교의 변증서들 가운데 가장 늦게 씌어진 이 답변에는 율리아누스의 글에서 발췌한 중요한 구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