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나흐

크라나흐

다른 표기 언어 Lucas Cranach the Elder
요약 테이블
출생 1472, 밤베르크 주교령 크라나흐
사망 1553. 10. 16, 작센바이마르 공국 바이마르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대표적인 화가.
본명은 Lucas M대체이미지ller.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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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비텐베르크 시절
  4. 말년
  5. 크라나흐에 대한 평가

개요

독일 회화의 전성기인 16세기에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수많은 그림, 목판화, 장식 예술품을 제작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단화, 궁정 초상화, 종교개혁가의 초상화, 수많은 여인화이다. 신체를 실제보다 길게 늘여 그린 여인 누드와 당시 유행하는 옷차림의 귀부인을 그린 여인화는 성서나 신화에서 따온 제목을 붙였다.

초기생애

크라나흐는 뉘른베르크에서 북쪽으로 약 90㎞ 떨어진 마을에서 태어났다.

독일 미술계의 위대한 천재인 알브레히트 뒤러보다 한 살 아래이나 그보다 25년이나 더 살았고, 사실상 그 시대의 중요한 독일 예술가들 가운데 가장 장수한 인물이었다. 크라나흐의 스승은 화가인 아버지 한스 뮐러였다. 그는 1495~98년 아버지와 함께 일했다. 1501년에 코부르크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작품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502년경으로 추정되는 그의 나이 30세에 빈에서 와병중에 그린 작품이다. 이미 30대에 들어선 그가 뮐러라는 성을 버리고 고향 마을의 이름인 크라나흐(지금은 크로나흐라고 부름)를 자신의 성으로 바꾼 곳도 빈이다.

1504년에 그는 〈이집트로 피신하는 도중의 휴식 Rest on the Flight into Egypt〉에 'LC'(루카스 크라나흐)라고 서명했다. 그는 회화와 목판화를 통해 도나우파 미술에 크게 이바지했다. 도나우파는 잘츠부르크와 인스부르크뿐만 아니라 빈·파사우·라티스본을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 유역의 유파였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후원을 받아 번창하고 있던 도시 빈에서 크라나흐는 대학교수인 인문주의자들과 알게 되어, 〈요하네스 스테판 로이스 Johannes Stephan Reuss〉(1503, 뉘른베르크 독일 국립미술관)·〈요하네스 쿠스피니안 Johannes Cuspinian〉(1502경~03, 스위스 빈터투어 오스카 라인하르트 미술관)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비텐베르크 시절

크라나흐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받은 것은 아마 빈에 있을 때였을 것이다.

전임자보다 2.5배나 많은 봉급을 받은 것을 보면 그때 그는 이미 유명화가였던 것이 분명하다. 1505년 봄에 그는 엘베 강 연안에 있는 대학도시이자 선제후의 궁정이 있는 비텐베르크에 도착해, 1550년 7월까지 45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크라나흐는 프리드리히를 포함하여 차례로 작센을 다스린 3명의 선제후에게 주문을 받았고, 많은 젊은 예술가들을 비텐베르크로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비텐베르크는 크라나흐로 인해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크라나흐의 이름은 학교 교장 게오르기우스 시부투스가 1507년에 라틴어로 발표한 크라나흐 찬가를 비롯한 많은 기록에서 자주 발견된다. 때로는 아무 주석도 없이 그의 이름이 불쑥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아마 그가 대중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교수인 법학자 크리스토프 쇼이를은 1509년에 출판한 〈오라티오 Oratio〉의 서문을 크라나흐에게 바쳤다. 크라나흐의 생애와 예술을 이야기한 이 라틴어 서문에서 쇼이를은 크라나흐의 인간성을 '친절하고 붙임성 있고 너그러우며 정중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잠시도 빈둥거릴 줄 모르는 그의 보기 드문 근면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장점들 덕분에 크라나흐는 인기 있는 궁정 화가가 되어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물론 그의 뒤를 이은 2명의 선제후에게도 계속 총애를 받을 수 있었고, 귀족과 부유한 부르주아지 및 대학교수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예술가가 되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에도 그가 가톨릭교도들에게서 계속 주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예술이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증거이며, 나아가 계층과 신앙을 초월해 사람을 대하는 그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보여주는 또하나의 척도이기도 하다.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는 1508년부터 비텐베르크대학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512년에 성서해석 박사가 된 뒤로는 교수가 되었다. 크라나흐는 루터와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루터의 글(1518~19)을 아름답게 꾸밀 장식 무늬를 도안한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로 루터에게 도움을 주었다.

또한 루터와 그의 아내 카테리나 폰 보라 및 부모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 초상화들을 비롯한 여러 초상화들은 우리가 오늘날 루터와 그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미 궁정 초상화를 그려왔던 이 화가는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통해 새로운 종교미술인 루터주의 회화의 창시자가 되었고, 루터파 교회를 위해 제단화를 비롯한 여러 그림을 그렸다.

크라나흐의 거대한 공방에서 제작된 미술품은 단순한 기능공의 그림으로부터 금박을 입힌 장식화나 건물 정면과 궁전의 큰 방에 걸 그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크라나흐는 또한 태피스트리와 훈장, 동전, 궁중의상, 방패의 문장, 대포의 장식, 채색 유리도 디자인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특히 유명한 것은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그린 제단화, 종교적 장면과 세속적 장면을 그린 패널화, 초상화이다. 그는 수많은 그림 이외에도 100점이 넘는 목판화와 삽화용 목판화 및 6점의 동판화를 남겼다.

비텐베르크에서 크라나흐는 오랫동안 단조롭고 평온한 생활을 했다.

1508~09년 그는 외교 사명을 띠고 플랑드르의 안트웨르펜에 갔다. 크라나흐는 40세가 된 1512년경에야 결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그는 1513년에 시장 광장 모퉁이에 있는 집을 샀는데, 이 집에는 포도주를 팔아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유리한 특권이 딸려 있었다. 이 집은 1523년에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가 숙소로 이용할 만큼 웅장하고 품위가 있었다. 크라나흐는 자본주의 초기의 전형적인 기업가답게, 궁정 화가의 직책을 훨씬 초월하는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는 포도주 장사로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1520년에는 약국을 사서 약제사의 조수들에게 세를 놓았다. 또한 일시적이나마 인쇄소도 소유했고, 책과 문구를 파는 가게도 경영했다(1524경). 1528년에 이르자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브뤼크 총리 다음으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었다. 게다가 크라나흐는 신교도뿐만 아니라 가톨릭교도에게서도 작품을 주문받았고, 군주뿐 아니라 종교개혁 지도자들에게서도 신뢰를 받았다.

또한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받아 1519~20년 시의회 의원을 지냈고 1537~38, 1540~41, 1543~44년에는 비텐베르크 시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도 몇 차례의 피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는데, 역시 화가인 그의 아들 한스가 1537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죽었고 그의 아내 바르바라가 1541년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

154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슈말칼덴 전쟁에서 신교도 군주들을 무찌르자 비텐베르크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이 종교전쟁에서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카를 5세의 포로가 되었다. 카를 5세는 플랑드르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그 무렵인 1508년에 크라나흐가 그려준 초상화를 갖고 있었다. 비텐베르크를 점령한 황제는 어린시절에 만난 크라나흐와 다시 사귀기 위해 비텐베르크 근처에 있는 사령부로 크라나흐를 불렀다. 크라나흐는 황제에게 붙잡혀 있는 선제후의 부름을 받고 1550년 7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그를 만났고 이듬해 그와 함께 인스부르크로 갔다.

루카스 크라나흐 〈카를 5세〉
루카스 크라나흐 〈카를 5세〉

이곳에서 그는 기분 좋게 지내기 위해 계속 그림을 그렸다. 또한 그곳에서 티치아노를 만났고, 1551년 티치아노의 초상화(지금은 없어짐)를 그렸다. 1552년에 마침내 영토가 많이 줄어든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는 바이마르에 궁정을 세웠다. 크라나흐는 80세에 바이마르에서 궁정 화가로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그는 이곳에서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크라나흐에 대한 평가

크라나흐는 작품에 이름을 적지 않았다.

1504년 이전의 초기 작품에는 전혀 서명되어 있지 않았다. 1504~06년에 'LC'로 서명했다가 1506~09년 띄어쓴 머리글자 'LC'를 서명으로 사용했으며, 1509~14년에는 그의 문장인 날개 달린 뱀을 첨가했고, 1515년부터는 날개 달린 뱀만 서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후로는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커다란 공방이나 화실(10명이 넘는 조수가 있었음)에서 만들어 그가 점검만 한 작품에도 모두 날개 달린 뱀으로 서명이 되었고, 그의 아들 루카스도 1586년부터 죽을 때까지 이 문장을 서명으로 사용했다.

이런 혼용 때문에 과연 그의 진품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날짜가 적혀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크라나흐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살펴보기 어렵게 만든다. 크라나흐가 30세에 그린 작품들은 바람에 휩쓸린 나무들과 폐허가 있는 알프스 산맥 기슭의 정서가 풍부한 풍경을 매우 경건하게 그린 것이었다. 후기에도 그는 여전히 그림을 통해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고대 신화에 나오는 장면이나 감각적인 누드화,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비례에 따른 호리호리한 인물을 그릴 때조차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샘가에 누워 있는 강의 요정 Reclining River Nymph at the Fountain〉·〈아담과 이브 Adam and Eve〉·〈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 Hercules and Antaeus〉 같은 그림들 외에도 성서에 나오는 살로메나 유디트 같은 미인들, 루크레티아와 파리스의 심판 같은 고전적 주제도 다루었다. 그는 성녀들을 유행에 따른 옷을 입고 온몸에 보석으로 치장한 아름답고 우아한 귀부인으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종교화와 세속화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소묘는 창의성이 풍부한 이 화가의 작품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1515년에 막시밀리안 황제의 기도서에 테두리 장식으로 그린 8점을 비롯한 극소수의 소묘만이 '완성작'이고, 나머지는 벽화·제단화·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거나 새로운 구상의 윤곽만을 미리 그려본 초벌 그림이다.

크라나흐의 묘비에는 '픽토르 켈레리무스'(가장 빠른 화가)라고 적혀 있고,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속도에 항상 놀라곤 했다.

그러나 바로 이 빠른 속도는 그의 예술이 지닌 한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장점은 심사숙고와 치밀한 구도 및 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력과 직감에서 나오는 충동적 창조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비영웅적인 전원풍경에서는 이런 독창력이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의 예술은 정치적 격변기에 특히 인기가 높았는데,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즉 그의 동시대인들이 공공생활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면서도 개인생활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도피할 수 있는 평화로운 피난처를 갈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크라나흐는 죽은 뒤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추앙받았다.

크라나흐의 아들 루카스 크라나흐는 1555년 비텐베르크 교구교회의 대형 제단화를 3폭화로 완성했다. 그 제단화의 양쪽 패널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대공 일가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중앙 패널에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를 씻고 구원받는 것이 비유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중앙 패널에는 세례 요한이 십자가 밑에 서 있고, 복음서 저자 요한과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사이에 아버지 크라나흐가 등신대로 그려져 있다.

그의 머리 위에는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구원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이 제단화는 비텐베르크를 통치한 대공 가문뿐만 아니라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및 거의 50년 동안 궁정 화가로 충실하게 봉사한 그의 친구 크라나흐까지도 불멸의 존재로 만든 기념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