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그리브

콩그리브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Congreve
요약 테이블
출생 1670. 1. 24, 잉글랜드 요크셔 리즈 근처 바드지
사망 1729. 1. 19,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신고전주의 극작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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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문필활동
  4. 콩그리브에 대한 평가

개요

화려한 희극적 대화술 및 상류사회에 대한 풍자적 묘사, 동시대인들의 가식적인 행위에 대한 반어적인 탐구 등을 통해 영국 풍속희극의 토대를 형성했다.

주요작품으로 〈늙은 독신자 The Old Bachelour〉(1693)·〈표리부동한 사람 The Double-Dealer〉(1693)·〈사랑으로 사랑을 Love for Love〉(1695)·〈세상만사 The Way of the World〉(1700) 등이 있다.

초기생애

1674년 군인이었던 콩그리브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욜에 있는 주둔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족을 데리고 아일랜드로 이주했다.

그후 1681년 그의 아버지가 캐릭퍼거스로 이동하게 되었을 때, 콩그리브는 아일랜드의 이튼이라 불리는 킬케니 스쿨에 입학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1686년 4월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1696년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명망 있는 세인트 조지 애슈에게 사사했는데, 애슈는 콩그리브의 학교 선배이자 평생 친구가 된 조너선 스위프트를 지도한 선생이었다.

콩그리브의 가족이 스태퍼드셔의 스트레턴에 있는 '콩그리브의 집'으로 이사해 온 것은 아마도 혁명기간중인 1688년으로 추정되며, 콩그리브의 아버지는 1690년 콕 백작의 부동산 관리인이 되었다. 1691년 콩그리브는 미들 템플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법률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가볍지만 경쾌하고 능숙한 스타일로 당대 유행하던 로맨스에 대한 의사(擬似) 패러디인 〈변명 또는 사랑과 의무의 화해 Incognita : or, Love and Duty reconcil'd〉를 클레오필이라는 가명으로 출판했다.

이 글의 초고는 아마도 17세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순식간에 문학계의 인사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같은 해 출판된 수필집에서 몇 편의 운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곧이어 존 드라이든이 그의 후견인이 되었는데, 드라이든이 유베날리스·페르시우스의 풍자시들을 번역해 출판할 때(1693), 콩그리브는 그의 작업을 도왔으며 〈드라이든 선생님께 To Mr. Dryden〉라는 축시를 쓰기도 했다.

문필활동

회복기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쓴 〈늙은 독신자〉(1690)가 1693년 3월 드루어리 레인의 로열 극장에서 상연되면서 그는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에게 늘 관대했던 드라이든은 그 극과 관련하여 비록 도시의 화려함을 차단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첫작품치고 일찍이 그가 읽었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했다. 이로써 이 작품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당시로는 전례 없는 14일간의 장기 공연을 기록했다. 다음 작품인 〈표리부동한 사람〉이 같은 해 11월 또는 12월에 드루어리 레인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이 작품은 전 작품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고, 작품의 활자본을 위해 드라이든이 지나친 찬사가 담긴 시를 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과 같은 갈채는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훌륭한 희극 작품으로 꼽히는 〈사랑으로 사랑을〉은 첫번째 성공을 거의 그대로 재현했다. 이 작품은 1695년 4월 링컨스 인 필즈에서 새 극장의 첫 작품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이 극장이 문을 연 시기는 배우들 사이의 언쟁으로 로열 극장이 오랫동안 위기에 처한 후였으며, 이로 인해 왕실의 의전 장관은 드루어리 레인 쪽에 부여한 기존의 공연권과 별도로 새로운 공연권을 이 극장에게 허가하게 되었다.

콩그리브는 새 극장의 매니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매년 새로운 작품을 이 극장의 극단에게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1695년 그는 더 공적인 행사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작품으로는 메리 2세 여왕의 서거에 바치는 목가시라든가, 그외〈핀다로스 송시(頌詩), 나뮈르를 취하게 되신 국왕 폐하께 삼가 바침 Pindarique Ode, Humbly offer'd to the King on his taking Namure〉 등이 있다.

당시 젊고 참신한 비평가였던 존 데니스가 행사와 관련된 그의 글을 모아 〈Letters upon Several Occasions〉(1696)를 출간하면서 〈희극에서의 기질에 관한 논의 Letter Concerning Humour in Comedy〉라는 글을 콩그리브에게서 얻어냈다. 이즈음 문인들 사이에서 콩그리브의 지위는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정부로부터 한직(閑職) 하나는 마땅히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행복했던 그 시절, 이와 같은 한직은 지배층의 권력자가 문학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포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콩그리브는 전세마차 자격을 허가하는 5명의 대리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 연봉 100파운드로 예전에 비해 다소 줄어든 셈이었다.

콩그리브는 링컨스 인 필즈 극장에 매년 1편씩의 작품을 제공하겠다는 애초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으나 자신의 작품인 〈소복을 입은 신부 The Mourning Bride〉를 상연하게 함으로써 선의를 보여주었다. 1697년초에 씌어진 이 비극은 현대 독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는 내용을 담고 있긴 하지만, 당시에는 그의 명성을 최고로 드높였으며 또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뒤 콩그리브는 더이상 극작품을 쓰지 않았으나, 1700년 3월 마침내 그의 최고 걸작 〈세상만사〉를 써서 링컨스 인 필즈 극장에서 호화배역으로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 자주 공연되는 콩그리브의 유일한 작품이지만, 당시에는 관객동원 면에서 실패했다. 물론 이 작품을 끝으로 연극계와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콩그리브의 마지막 희극 작품이 되었다.

그후 그는 2편의 오페라를 위해 대본을 썼고, 1704년 링컨스 인 필즈에서의 공연을 위해 몰리에르의 〈푸르소냐크 씨 Monsieur de Pourceaugnac〉를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705년 그는 퀸스 극장(또는 이탈리아 오페라 하우스)에서 극작가이자 건축가인 존 밴브러 경과 잠시 함께 일했는데, 이 극장의 첫 상연 작품을 위한 에필로그를 쓰기도 했다.

콩그리브는 여생 동안 매우 평온한 삶을 보냈다.

이는 그의 개인적 소득을 비롯해 희극 작품과 관련된 공연료와 별달리 고된 일이 없는 공직 덕분이었다. 1705년 그는 포도주 관리담당관 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1710년 정부가 바뀔 때도 이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오랜 친구였던 조너선 스위프트의 중재 덕분이었다. 그러나 1714년 이 일을 그만두고 세관에 자리를 얻게 되었다. 계속 지위가 상승되어 마침내 그해말 자메이카 섬의 서기관직을 추가로 맡게 되었다. 또한 콩그리브는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일부는 가벼운 사회적 다양성을 표현한 것이었고, 일부는 호메로스·유베날리스·오비디우스·호라티우스 등의 작품을 철저하게 학술적으로 번역한 것들이었다.

그밖에 그의 시작으로는 핀다로스풍의 송시도 있다. 이들 송시가 실려 있는 그의 저서에는 시기 적절한 그의 논문 〈핀다로스풍의 송시에 관한 담화 Discourse on the Pindarique Ode〉(1706)가 함께 실려 있으며, 이 논문은 시인인 에이브러햄 카울리 이후 걷잡을 수 없이 자유 분방해졌던 이 송시 형식에 어느 정도의 형식을 부여했다.

콩그리브는 매우 친밀하고 지속적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교제했는데, 일찍이 아일랜드에서 교제했던 평범한 친구로부터 당대 문예계의 저명인사에 이르기까지 두루 친분을 맺고 있었다.

제이콥 톤슨이라는 출판업자와 잠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을 제외하면, 그와 친구들 사이에 언쟁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어쨌든 그와 스위프트 사이의 친분은 아일랜드에서의 초기 시절 이래 변함없는 애정으로 유지되었다. 〈거지 오페라 The Beggar's Opera〉의 저자인 시인 존 게이는 콩그리브를 '조금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다.

알렉산더 포프는 자신의 번역 작품 〈일리아스 Iliad〉를 그에게 헌정했고, 리처드 스틸 경 또한 자신이 편집한 조지프 애디슨의 〈북치는 사람 The Drummer〉을 그에게 헌정했다. 여성과의 관계를 보면, 대부분의 그의 작품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앤 브레이스거들 부인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두 사람은 늘 가까운 친구로 지내왔으나, 그들의 친밀성이 어느 정도 깊은 것인지는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다. 말년에 그는 말버러 공작 부인에 대한 애정에 헌신적으로 몰두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가 그녀의 둘째 딸이자 후에 리즈 공작 부인이 된 레이디 메리 거돌핀의 아버지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전재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유산을 말버러 공작부인에게 남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1729년 그는 마차 사고로 죽었다.

콩그리브에 대한 평가

자일즈 제이콥은 그의 〈Poetical Register〉(1719)에서 콩그리브의 성격에 대해 칭찬했는데, 콩그리브는 "허영이나 허세를 부리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며…겸손으로 가득하고 천성이 착한 사람으로서, 그를 보면 시인이라기보다는 신사처럼 느껴진다"고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이 인용의 마지막 귀절은 그와 볼테르의 유명한 만남을 설명하는 데 좋은 지침이 될 것이다. 볼테르는 1726년 유명인사를 찾아 영국으로 와 당대 영국의 위대한 희극 작가인 콩그리브로부터 무언가 좀 얻어내려고 했다. 당시 콩그리브는 기력이 쇠하고 피로해 있던데다가 통풍에 시달렸으며 시력까지 반쯤 잃어버린 상태여서, 희극 작법이나 30여 년 전에 썼던 희극에 관해 논할 만한 상태가 전혀 아니었다. 그는 볼테르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그와 함께 기꺼이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것(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신사의 지위'와 같은 것)이지, 전문가적 비평 지식을 드러내야 하고 이른바 대가(볼테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그런 주제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콩그리브는 뛰어난 영국의 풍속희극 작가였으며,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당대의 극작가들과는 눈에 띄게 달랐다.

그는 그의 작품의 대상이 되는 계층, 다시 말해 주로 궁정 출신의 반(反)청교도주의적 관객층의 풍속과 행동 양식에 관한 이야기를 주요주제로 삼았으며, 그러면서도 프랑스식 관습의 모방자들이나 우쭐대는 재사(才士)들, 온갖 종류의 별난 이야기를 다루었다. 한편 극의 중심 주제는 샤를 2세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궁정인사들의 이성 관계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자유의 철학관과 실험 정신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왕정복고기의 코미디는 예외 없이 비판적인 희극이었으며, 이들 극의 목적은 '무절제 치유'와 당대의 사치스럽고 허황된 허세 위에 '상식이라는 예리한 칼'을 얹어놓는 것이었다. 콩그리브가 당대의 다른 극작가보다 뛰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섬세한 감정과 표현의 완벽성에 있었다.

후자의 특성은 그의 극 〈늙은 독신자〉의 서두 연설에 잘 드러나 있는데, 이 극은 관객들이 이미 친숙해 있는 주제를 뛰어난 솜씨로 새롭게 다루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없이 관객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군데군데 즉석 재치응답이 다소 천박하고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바로 그 시대의 모습을 담은 것이었으며, 나아갈수록 그의 연설은 더욱 변조가 잘 맞고 음악적이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운율은 확실하게 맞아 떨어졌다. "문장마다 센스와 풍자가 넘친다"고 윌리엄 해즐릿은 지적하면서 "그의 글은 가장 세련되게 다듬어진, 그리고 가장 신랄한 용어로 의미를 전달한다"고 부연했다. 또한 조지 메러디스는 "그는 표현이 정확하면서도 변설에 뛰어나며…… 이런 면에서 그의 작품은 하나의 고전이며 몰리에르의 작품과 견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극찬한 바 있다.

그러나 콩그리브는 그의 마지막 희극 〈세상만사〉에서 비로소 완벽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작품에서 그는 하려던 말을 모두 분명히 드러냈고, 유일한 흠이라면 플롯의 장치가 인위적이라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인위적인 가식을 당당하게 조롱하는 것 이상의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사랑이라는 것을 단순히 욕망의 충족이나 이성간의 전쟁으로 이해하거나, 또는 감정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지의 문제라고 보는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사랑을 '합리화'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다른 어떤 작가들보다도 더 깊게 사랑의 문제에 천착했다. 또한 개개인에 대해 훨씬 더 진지하게 느낌으로 이해하려 했고 또한 표현 면에서 훨씬 더 섬세했다. 그는 세심한 장인(匠人)이었으며, 그의 손에서 나온 작품치고 철저한 사고와 전문가적인 계획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작품은 없었다. 비록 몰리에르와 필적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영국의 극작가 중에서 몰리에르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