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

코소보

다른 표기 언어 Kosovo 동의어 코소보 공화국, Republic of Kosovo
요약 테이블
위치 발칸 반도
인구 1,771,065명 (2024년 추계)
수도 프리슈티나
면적 10,908㎢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코소보 공화국 (Republic of Kosovo)
기후 온화한 대륙성기후, 남서쪽은 지중해성기후 의 영향을 받음
민족 구성 알바니아인 93%, 세르비아인 2%, 그외 5%
언어 알바니아어, 세르비아어
종교 이슬람교(90%)
화폐 유로 (€) 환율계산기
국가번호 383
GDP USD 8,359,000,000
인구밀도 153명/㎢
전압 230V / 50Hz, 400V / 50Hz
도메인 .xk

요약 유럽의 발칸 반도에 있는 국가. '코소보(Kosovo)'라는 이름은 세르비아의 지명에서 파생된 것으로 '검은 새의 들판'이라는 뜻이다. 발칸 반도에서 토지가 비옥한 지역 중 하나이며, 곡물·채소·담배·대마·사과·포도 재배가 활발하다. 오랫동안 세르비아계 민족과 알바니아계 민족이 살아왔던 지역으로,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민족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에 속한 알바니아계 민족들이 세르비아에 대항하여 독립을 추진하여 2008년 독립선언을 했으나 세르비아 등 많은 나라들이 인정하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2015년을 전후하여 많은 난민이 발생했다. 오랜 내전으로 실업률이 높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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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연환경
  2. 기후
  3. 식생
  4. 국민
  5. 언어
  6. 종교
  7. 경제
  8. 정치
  9. 역사
    1. 중세이후 19세기까지
    2. 유고슬라비아 시대
    3. 코소보 분쟁
    4. 코소보의 독립 선언
  10. 한국과의 관계
    1. 외교
    2. 교민 현황
코소보 국기
코소보 국기

유럽의 발칸 반도에 있는 국가. 2008년에 세르비아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과 유럽연합 회원국의 대부분이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했으나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비롯한 여러 다른 나라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아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2010년에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코소보의 독립선언이 국제법적으로 유효하다고 판결했으나, 세르비아는 이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코소보는 발칸 반도에서 토지가 비옥한 지역 중 하나이며, 곡물·채소·담배·대마·사과·포도 재배가 활발하다. 수도는 프리슈티나이다. 면적 10,908㎢, 인구 1,771,065명 (2024).

지도

자연환경

코소보는 바다와 면하지 않은 내륙국으로, 북쪽과 동쪽은 세르비아와, 서쪽으로는 마케도니아와, 북서쪽으로는 몬테네그로와, 서남쪽으로는 알바니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코소보의 영토는 자메이카, 레바논과 거의 같은 면적이며, 발칸 반도에서는 가장 작은 나라이다. 코소보의 국경 지역은 가파른 봉우리와 깊은 협곡이 많은 산악 지대로 되어 있다. 샤르 산이 마케도니아와의 국경을 가르고 있고, 코파오니크산이 세르비아와의 동북쪽 국경을 가르고 있다. 알바니아와의 국경에 있는 세라비카 산이 2,656m로 가장 높다. 석회암 동굴이 전역에서 발견된다.

코소보는 2개의 큰 산간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의 코소보 분지에는 시트니차 강이 흐르며,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프리슈티나와 코소프스카미트로비차가 있다. 서쪽의 메토히야 분지에는 알바니아와 경계를 이루는 벨리드림 강이 흐르며, 주요 도시로 페치와 프리즈렌이 있다. 광물자원으로 갈탄·아스팔트·마그네사이트 등이 있다. 이 지역은 발칸 반도에서 토지가 비옥한 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곡물(밀·보리·옥수수)을 비롯해 채소·담배·대마·사과·포도 재배가 활발하다.

기후

전체적으로 코소보는 온화한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지중해에 가까운 남서쪽은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여름의 평균 기온은 20 ℃이며, 겨울의 최고 기온은 약 5 °C 정도이다. 매년 650mm이상의 강수량을 보이며, 겨울에는 눈도 많이 내린다. 산악 지역은 저지대보다 기온이 낮고, 강수량은 많다.

식생

영토는 작지만 코소보의 식생은 다양한 편이며 코소보에서만 자라는 식물도 12종이 있다. 영토의 40%가 산림 지역을 이루는데 저지대에는 참나무가 많고, 고산지대에는 소나무가 많다. 갈색곰, 야생고양이, 늑대, 여우, 붉은 사슴 등이 산악지역에 서식하며, 200여 종의 새들이 관찰된다.

국민

이 지역에는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민족이 오랜 역사를 두고 살아왔으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세르비아계의 이주와 알바니아계의 높은 출생률로 국민 구성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다. 알바니아계는 1946년에 약 50% 정도였으나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80%로 증가한 반면, 세르비아계의 인구는 20% 미만으로 감소했다. 1998~1999년의 코소보 분쟁 이후에는 세르비아계가 세르비아로 이주하면서 이런 상황이 가속화되었고, 2010년을 넘어서면서 알바니아계가 93%, 세르비아계는 1.5%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머지 인구는 보스니아계 등 여러 다른 민족들이다. 코소보의 인구는 상당히 젊은 편이다. 약 25%가 15세 미만이며, 65세 이상은 10%에 불과하다.

언어

알바니아어와 세르비아어가 코소보의 공용어이다. 알바니아어는 통신과 방송에서 사용되는 표준어로 인정되고 있다. 보스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어로 알려진 세르보크로아티아어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계 및 몬테네그로 족이 사용하고 있다. 이 언어들은 많이 유사하기 때문에 서로 이해가 가능하지만, 서로 다른 언어라고 인식하고 있다.

종교

코소보에는 국교가 없다. 알바니아인을 포함한 90%가 넘는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지만 대부분 형식적으로 믿는 경향이 강하다. 세르비아계는 대부분 동방정교회를 믿는다. 소수의 알바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로마가톨릭교를 민든다. 중세까지만 해도 동방정교회가 코소보 지역의 주된 종교였지만, 15세기 이후 4세기에 걸쳐 오스만투르크족에게 정복되면서 이슬람교가 크게 전파되었다.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 이슬람교의 세 종교가 공존하면서도 큰 갈등이 발생하지는 않았는데,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경우에도 대부분 다양한 형태의 종교의식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경제

코소보는 오래 전부터 발칸 반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던 20세기 후반에는 연방정부에서 코소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적었던 까닭에 분쟁이 잦았는데, 이것이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를 낳았다. 1998~1999년의 코소보 분쟁 때에 이 지역에 국제기구가 대규모로 설치되면서 경제가 활성화되어고, 2002년부터 비공식적으로 채택한 유로화의 사용이 인플레이션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2008년 이후의 독립 정부에서는 국영 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시장 경제를 강화하려 노력했지만, 주요 수입 품목인 식량과 연료의 가격 변동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아직도 작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독립 이후 노동인구의 약 40~50%가 실업상태를 면치 못하는 경제적 악순환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정치

선거권은 18세부터 주어진다. 독립 이후 주요 정당들은 민족에 따라 구성되었다.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정당인 코소보민주연합당과 코소보민주당은 하심 타치를 중심으로 코소보 최초의 연합 정부를 구성했다. 코소보민주연합당은 파트미르 세지우와 이브라힘 루고바의 지도 아래 코소보의 독립을 이끌었으나 1998~1999년의 코소보 분쟁 이후 알바니아계 게릴라 단체였던 코소보해방군의 지도자 타치가 이쓰는 코소보민주당이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코소보민주당과 코소보민주연합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코소보를 통치하고 있다. 민족에 따라 다양한 소규모 정당이 존재한다.

역사

중세이후 19세기까지

'코소보(Kosovo)'라는 이름은 세르비아의 지명에서 파생된 것으로 '검은 새의 들판'이라는 뜻이다. 중세 후반 세르비아 네만자 왕조의 중심부였던 코소보는 12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중엽까지 동방정교회가 번성한 곳이었다. 그러나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패한 후 15세기 중엽에 세르비아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8세기 이래 코소보에서는 알바니아어와 슬라브어가 혼용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승리 후 코소보에 거주하던 많은 기독교계 세르비아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슬라브어 사용이 줄어든 반면, 알바니아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남아 알바니아어 사용이 늘어났다. 1699년 오스트리아 군대와 함께 세르비아인들이 이곳을 침략했다가 패퇴했는데 이때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후퇴하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합류했다. 코소보의 인종 구성에서 알바니아인들이 많아지고, 1766년에는 페치에 있는 세르비아 정교회 관구가 폐쇄되면서, 세르비아 문화의 중심지로서 코소보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그러나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의 옛 영화를 상징하는 지역이 되었고, 코소보가 세르비아 민족의 수난과 열망을 대표하는 곳으로 묘사한 서사시도 출현했다. 한편 알바니아계 또한 이 지역에 일체감을 느꼈으며, 19세기말 무렵 코소보에 있는 도시 프리즈렌은 알바니아 문화의 중심지로 민족적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되었다. 19세기초 터키에서 독립한 세르비아는 1913년 코소보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얻었다.

유고슬라비아 시대

코소보는1918년 세르비아의 일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후에 유고슬라비아로 개칭)에 편입되었다. 1920~30년대에 세르비아는 코소보에 세르비아인들을 다시 정착시키려 했으나 토착 알바니아계의 저항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코소보는 이탈리아의 보호 하에 이웃한 알바니아에 잠시 동안 통합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 유고슬라비아의 새 공산주의 정부는 알바니아와 통합되기를 원하는 코소보 알바니아계의 반란을 진압하고 코소보에 세르비아 공화국 내 자치주의 권한을 부여했다.

아울러 세르비아 공화국은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의 민족 감정을 계속 억누르려 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연방정부는 유화정책을 실시하여 알바니아계의 민족 정체성을 살리고 알바니아계의 지방 및 연방 정부 진출을 허용했다. 이 지역의 알바니아화는 세르비아계의 급격한 도시 이주로 촉진되었다. 세르비아계의 이주와 알바니아계의 높은 출생률의 결과 1946년 인구의 절반이었던 알바니아계는 1981년 인구의 3/4, 1991년 인구의4/5에 이르렀다. 반면 세르비아계의 인구는 1/10로 떨어졌다. 1974년 공포된 연방헌법에 의해 코소보의 지위는 자치주에서 명목상 공화국의 지위로 바뀌었다.

1973년과 1979년 국제 에너지 위기로 유고슬라비아 내 공화국들 사이에 저개발 지역에 대한 지원문제를 놓고 긴장이 높아지다가 1981년에는 심각한 내전 양상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공화국들간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과정에서, 세르비아 정치인들은 코소보가 다른 유고슬라비아 내 공화국들과 함께 세르비아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취한 것에 분개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인의 분노를 이용하여 1987년 세르비아 공산당의 당수가 되었고, 1989년 세르비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어 유고슬라비아 연방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밀로셰비치는 대통령이 되자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세르비아 공화국이 직접 통치하도록 했다. 이 조치에 대해 알바니아계가 격렬히 저항하자 밀로셰비치는 연방군을 투입하여 자치주 의회를 해산하고 알바니아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폐쇄했다. 이에 대해 코소보인들은 그해 9월 실시된 국민투표(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함)에서 세르비아를 연방에서 분리하는 안을 압도적으로 찬성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각 공화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세르비아 공화국의 강경탄압 문제 등이 주 원인이 되어 1991년 연방이 붕괴되고, 1992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공화국만으로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결성되었다.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신 연방의 위협에 직면한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는 세르비아의 통치에 대해 수동적이고 비폭력적인 저항운동을 채택하고, 비폭력주의자인 이브라힘 루고바의 지도 아래 알바니아어를 가르치는 학교와 각종 시민기구를 조직했다.

그러나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세르비아가 지배하는 신 연방에서 독립이나 최소한의 자치권을 얻으려는 알바니아계의 운동은 실패했다. 대부분의 알바니아계가 여전히 비폭력 운동을 선호했음에도 1996년 알바니아계 게릴라 조직인 코소보 민족해방군(Kosovo Liberation Army/KLA)이 출현하여 코소보 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코소보 분쟁

인근 알바니아에서 구입한 무기로 무장한 이들이 공격의 강도를 높여가자 1998년초 신 연방군은 KLA의 거점지역인 드레니차로 진격해 KLA와 교전을 벌였다. 이 와중에 발생한 세르비아 군대에 의한 무차별 학살로 KLA 지원병이 늘어났고 여름 무렵에는 KLA와 중무장한 세르비아군 사이의 전선이 확장되었다. 세르비아 군대는 알바니아계를 마을에서 소개하는 작전을 구사했는데 이들 피난민들이 처한 곤경이 국제사회의 주요 관심사가 됨에 따라 국제사회와 세르비아, 알바니아계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1998년 11월에 타결된 정전 협정은 그해말 세르비아가 KLA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파기되었다. 1999년 2월 프랑스 랑부예에서 정전 협상이 재개되었으나 3월 중반에 협상은 실패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은 유고슬라비아 일부 지역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해 세르비아군은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에 대한 대대적인 인종학살을 자행했으며, 학살을 피하기 위해 수천 명의 알바니아계가 인근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로 몰려들었다.

NATO군의 폭격은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6월까지 계속되었다. 평화협정 체결로 세르비아 군은 코소보에서 철수했고 NATO의 평화유지군이 코소보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코소보는 국제연합(UN) 관할로 넘어갔고 UN 안전보장이사회는 3년 이내에 총선을 통해 자치정부를 구성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2001년 11월 17일 치러진 총선에서 알바니아계가 압승을 거두었다.

코소보의 독립 선언

2003년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이름을 바꾸었고, 2006년에는 독립국가로 분리되었지만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영토를 계속 장악했다. 하지만 코소보는 독립국가가 되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고, 2008년 2년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2008년 말에는 유럽연합의 파견단이 그동안 유엔이 담당했던 경찰과 사법, 관세 활동을 감독하기 시작했다.

2010년 11월에는 코소보민주당의 하심 타치 총리가 이끄는 내각을 코소보의회가 신임하면서 타치 총리가 계속 총리로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세르비아와 접한 북부 지역의 내정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2013년 4월 코소보와 세르비아는 코소보 북부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합의에 도달했지만, 세르비아에서는 여전히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은 가운데, 2014년 6월의 총선에서 새로운 정부가 만들어졌다. 코소보민주당의 이사 무스타파가 총리가 되었고, 타치 전 총리는 부총리와 외무장관을 맡았다. 2015년 8월 코소보와 세르비아가 관계정상화에 큰 진전을 이루어, 코소보 내의 세르비아 공동체가 자치권을 부여받았지만, 주변 국가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이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2015년 2월을 전후하여 5만 명에 가까운 난민이 코소보를 탈출, 유럽 각국에 망명 신청을 하여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한국과의 관계

외교

한국은 코소보와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고, 1966년 설립된 주오스트리아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코소보의 영사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교민 현황

2023년 기준 코소보에 거주하고 있는 재외동포는 25명이며,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코소보 국적의 등록외국인은 5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