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루비니

케루비니

다른 표기 언어 (Maria) Luigi (Carlo Zenobio Salvatore) Cherubini 동의어 루이지 케루비니, 마리아 루이지 카를로 제노비오 살바토레 케루비니
요약 테이블
출생 1760. 9. 14, 피렌체
사망 1842. 3. 15, 파리
국적 이탈리아/프랑스

요약 이탈리아 태생 프랑스의 작곡가.

케루비니 (Maria Luigi Carlo Zenobio Salvatore Cherubini)
케루비니 (Maria Luigi Carlo Zenobio Salvatore Cherubini)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던 시기에 활동했으며 프랑스 오페라의 발전에 공헌했고 종교음악의 대가였다. 성숙기 오페라들은 새로운 기법과 낭만주의 오페라적인 주제가 특징이었으나, 극적인 특질은 고전주의의 절제와 단아함에서 비롯되었다.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오페라 및 종교음악 작곡가로 유명했던 주세페 사르티 밑에서 공부했다. 대부분의 초기 작품은 종교음악이었으나, 이후 15곡의 이탈리아 오페라, 14곡의 프랑스 오페라 등 주로 무대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다. 1785년 영국 왕 조지 3세의 작곡가가 되었고, 1795년에는 새로 설립된 파리 음악원의 감독원으로 일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1814년 프랑스 왕정의 복고로 루이 18세의 왕립 교회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했다. 1822년 파리 음악원 원장이 되었고, 이후 그 자리에 있으면서 젊은 세대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정치적·음악적으로 혁명의 시기에 활동했으면서도 천성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모순된 점이 있었다. 18세기의 귀족적 오페라 양식인 오페라 세리아의 전통 속에서 길들여졌고, 파리의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인 테아트르 드 므시외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작곡한 초기 작품들에는 영웅적·귀족적인 웅장함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후기작품, 특히 프랑스에서 작곡한 것들은 크리스토프 글루크(1714~87)의 오페라 개혁에 따라 변화하는 세계에 적합한 주제를 찾았다. 즉 귀족적 영웅주의에서부터 보통 사람의 고결함으로 바뀌었다.

〈메데이아 Médée〉(1797)처럼 고대의 고전적 주제를 다룬 오페라에서조차 인간적 특성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의 새로운 양식의 출발점이 된 오페라는 〈로도이스카 Lodoïka〉(1791)이다. 이 작품은 독창에 역점을 두는 오페라 세리아의 특성에서 벗어나 성악 앙상블과 합창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관현악에 새롭게 극적인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이로써 옛 양식과 19세기 프랑스의 그랑 오페라 사이의 연결점을 제공해주었다.

그는 화성과 리듬, 음악 형식에 있어서는 고전주의의 어법을 고수하고 새로운 낭만주의 양식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오페라에 영향을 받았던 베토벤은 〈피델리오 Fidelio〉를 작곡하기 이전에 〈피델리오〉와 비슷하게 '구원'을 주제로 한 케루비니의 오페라 〈2일간 Les Deux Journées〉(1800, 독일어 곡명은 〈물을 운반하는 사람 Der Wasserträger〉)의 악보를 연구했다. 이 오페라는 케루비니의 걸작 오페라로 간주된다.

만년에 교회음악으로 전환했는데, 이 시기에 작곡한 F장조 미사곡(1809)과 남성 성부를 위한 D단조 진혼곡(1836) 등을 비롯한 2곡의 진혼곡은 고전주의적인 투명함과 종교적 장려함을 한데 섞은 것이 특징이다. 다수의 논문을 썼고, 특히 〈대위법과 푸가 연구 Cours de contrepoint et de fugue〉(1835)가 유명하다. 이 논문은 케루비니의 실제 음악보다 음악적으로 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