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날레토

카날레토

다른 표기 언어 Canaletto
요약 테이블
출생 1697. 10. 18, 베네치아
사망 1768. 4. 20, 베네치아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화가.
본명은 Giovanni Antonio Canal.

상세하게 그린 풍경화(vedute)에서 베네치아와 런던 및 영국 교외의 분위기를 훌륭하게 묘사하여 후대의 풍경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카날레토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때때로 가문의 문장(紋章)을 서명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카날레토로 알려지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아마 이 이름은 그의 아버지와 그를 구별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아버지 베르나르도 카날은 극장의 무대 배경을 그리는 화가였으며 카날레토는 작업실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카날레토는 1716~19년에는 베네치아에서, 1719~20년에는 로마에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오페라를 위한 배경 장면을 그리는 등 아버지, 동생과 함께 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카날레토가 무대 그림을 그만두고 지지적(地誌的)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로마에서였는데,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라든가 담채화 기법을 사용하며 무대에서와 같은 원근법을 이용한 점에서 여전히 무대 그림과 아주 비슷했지만 이 그림들로 말미암아 그뒤 곧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베네치아로 돌아와서 외국인 후원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그의 전생애에 걸쳐 계속 주요한 후원자가 되었다.

1723년 이전에 리히텐슈타인의 왕자를 위해 4점의 대작을 완성했으며, 1725~26년에는 루카 출신의 상인인 스테파노 콘티를 위해 일련의 그림들을 완성했다. 이무렵 그가 얼마나 바쁘고 힘들었는지는 콘티의 비망록에 잘 나타나 있다. 카날레토에 따르면, 그림들을 넘겨주는 것이 늦어진 이유는 우선 수많은 주문들이 밀려들어왔고, 그 자신은 좋은 물감을 써서 실물을 기초로 그리는 것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석공의 작업장 The Stonemason Yard〉(런던 국립미술관)을 비롯한 1720년대 후반의 그림들에서 그는 좀처럼 성취하지 못할 대담하고 섬세한 양식을 사용해 베네치아의 건축을 풍부하게 극적으로 해석했다. 그가 햇빛과 그림자, 구름의 효과, 건물에 대한 빛의 작용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당시의 화가들에게는 매우 특이한 방식인 야외 사생이라는 그의 비망록에 나오는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1730년대 내내 카날레토는 베네치아의 풍경화에 대한 외국인들의 주문을 충족시키는 데 전념했다.

그는 심한 부담을 느껴 결국에는 실물을 기초로 하기보다는 주로 소묘와 심지어는 다른 미술가들의 판화를 기초로 해서 작품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한 렌즈를 통해 그라운드글래스 스크린 위에 소묘나 밑그림용으로 쓸 풍경의 상을 맺게 해주는 장치인 '카메라 오티카'(camera ottica)의 사용을 개발했으며, 후에 기계적인 방법을 개발했는데, 여기에서는 자와 컴퍼스가 사용되었으며 건축물과 인물들은 훌륭하고 효과적인 공식에 따라 배치되었다.

그의 생애에 엄청나게 많은 베네치아의 풍경화가 만들어져서 카날레토가 대규모 작업장의 우두머리였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전혀 없다.

카날레토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
카날레토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

당시에 카날레토에 견줄 만한 상대는 거의 없었다. 그가 주로 외국의 고객을 위해 지지화를 그리기로 결정하는 데에 처음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는 화가인 루카 카를레바리스는 경쟁에서 밀려났고, 카날레토의 조카인 베르나르도 벨로토는 아직 성숙한 화가가 아니었으며, 미켈레 마리에스키는 경쟁자라기보다는 그의 추종자였다.

이렇게 독보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카날레토와 거래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영국의 유명한 오페라 배우 겸 카날레토의 후원자인 오웬 맥 스위니는 일찍이 1727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 친구는 성격이 변덕스러우며 그래서 그가 요구하는 가격도 날마다 변한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에 긍지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미술가는 그로 인해 가격은 물론 그림도 더 나쁘게 평가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740년 오스트리아의 왕위계승을 놓고 전쟁이 일어나자 베네치아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의 수가 갑자기 줄어들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카날레토에게 들어오던 주문도 급격히 감소했다.

이무렵 일찍부터 알고 지내던 조지프 스미스(출판업자 겸 상인으로, 뒤에 베네치아에 주재하는 영국 영사가 됨)가 그에게 원조의 손길을 뻗쳤다. 양식적인 베네치아의 풍경화에 대한 수요가 떨어지자 스미스는 카날레토에게 주제의 범위를 넓혀 로마의 기념물과 파도바 지방 및 브렌타 강 유역의 풍경 등을 그리도록 권유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의 장소를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요소들을 재배치한 카프리치오(capriccio) 그림들과 거의 완전히 상상에 의한 건축 및 배경 요소들로 이루어진 이상화된 베두타 그림들이 카날레토의 작품에서 점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1741~44년 카날레토는 매우 솜씨가 뛰어나고 섬세한 30점의 에칭 연작을 제작했는데, 이것들은 능숙한 원근법 및 명암처리를 보여준다.

관광객들이 더욱 줄어들자 그의 국제적인 명성은 오히려 높아졌다.

1746년 그는 영국에 가서 크게 환영받았으며, 작센의 선제후로부터 드레스덴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지만 1755년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그는 주로 런던에서 영국의 풍경을 그렸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을 고려할 때, 베네치아의 경험을 기초로 다양한 전통을 이끌어낸 50세의 노장 카날레토가 전혀 다른 정서적 환경과 주제를 다룬 것이 눈에 띈다. 때때로 그는 베네치아풍의 분위기에 영국식 소재를 집어넣음으로써 걸작을 만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의 평소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이었으며 활기가 없고 기계적이었다.

그러나 베네치아로 돌아와서도 그의 명성은 떨어지지 않았으며 마침내 공식적인 인정을 받아 1763년 베네치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고 같은 해에 콜레조 데이 피토리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