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체제

진관체제

다른 표기 언어 鎭管體制

요약 조선 전기에 시행된 지방 군사통솔체제.

세종 이래 연해·국경 등의 요새지에 영·진을 두었던 지방방위조직은 내지(內地) 주현의 방어가 소홀해지는 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조 때부터 국경지대인 평안도·함길도에 설치되었던 군익도(軍翼道)의 체제를 전국적으로 확장했다. 이에 내륙지방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위의 여러 읍을 중익·좌익·우익의 3익체제로 정비했으며 각 읍의 수령들도 모두 군직(軍職)을 겸해 중익수령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 하고 좌익·우익 수령을 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로 했다.

그리고 이들은 중앙으로 번상한다든가 또는 현지의 영·진·포에 입번하는 군사와 하번한 군사의 습진(習陣)에 관한 일들을 관장했다. 동시에 잡색군도 모두 각 익에 소속시켜 전국의 지방군 조직을 처음으로 획일화했다. 이러한 군익제도는 1457년(세조 3)에 주요지역을 거진으로 하되 나머지 주변지역의 여러 진을 그에 속하도록 하는 진관체제로 개편되었다.

진관체제가 군익체제와 다른 점은 종래 행정구역상의 도(道)와 혼돈하기 쉽던 도의 조직을 요새지나 군사기지로서의 거점적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진으로 표시한 것과, 익의 체제를 지양하고 거진을 중심으로 여러 진이 이에 속하도록 하여 독진(獨鎭) 등을 없애고 각진의 독자성을 살리는 등 일원적 군사체제를 더욱 분명히 한 점이다.

1464년(세조 10)에는 정병(正兵)과 영진군(營鎭軍)을 합속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따라서 각 진관별로 시위군과 영진군을 각각 별도로 선발하여 서울의 번상시위와 진의 방위를 담당하던 체제에서, 각 관의 정병은 평상시 거주지역의 방위를 담당하다가 번차에 따라 상경 숙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진관편제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각 도에 병마절도사를 두어 도내 육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했는데 이를 주진(主鎭)이라 했다. 주진 아래에는 거의 목사가 겸직하는 첨절제사가 지휘하는 거진이 있었다.

말단 진은 군수 이하가 첨절제사 이하의 직함을 맡았다. 한편 수군도 육군의 진관편성체제에 따라 진관조직을 갖추었다. 육군과는 달리 제주도나 교동도 등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수령의 겸임이 없고 최고지휘관인 수군절도사 밑에 우후·첨절제사·만호 등의 직함을 두었다. 이로써 전국이 군사적으로 일원적인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진관체제는 성립기반이 지나치게 광범위하여 실제 방어에 있어서는 오히려 무력함이 나타나 그 기능을 상실해갔다.

그 위에 대토지집적 현상이 일반화되어 이로 인해 지주전호제가 확대되고, 군역의 대납화·포납화가 늘게 되자 군사편성체제의 변화가 초래되어 진관체제는 15세기에 들어와 커다란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즉 군사의 군역부담을 지원해주던 보인의 수가 감소되고 지주전호제가 확대됨에 따라 자연호 단위의 경제권이 위협받아 군사의 부담능력을 더욱 위축시켰다. 이것이 포납화 곧 방군수포(放軍收布)의 동기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방군의 대가로서 받는 포가 지방재정을 충당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그 고을에 해당된 전세·공물·진상물 등을 부담하기 위한 재원으로 방군수포는 더욱 확대되었다. 수군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그들의 역이 여러 병종 가운데 가장 고된 중역이었을 뿐 아니라 세습적인 요소가 많았고 또 연해의 각 포(浦)는 행정구역과는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본시 수군 이외에 부족한 인원을 근처 연해민이 아닌 자로 충당하기도 하여 정병보다 더 피폐해져 사실상 진관체제는 유지되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초의 전국적인 방위망인 진관체제는 유사시 여러 지역의 군사를 특정장소에 집결시켜 대처하는 이른바 제승방략(制勝方略)의 응급적인 분군법(分軍法)으로 대체되어갔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이것마저 제 구실을 하지 못함에 따라 유성룡(柳成龍)에 의해서 진관체제의 재정비론이 거론되었고, 이후 지방에 속오군(束伍軍) 등이 설치되었다.→ 유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