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최규하

다른 표기 언어 崔圭夏 동의어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요약 테이블
출생 1919. 7. 16, 강원도 원주
사망 2006. 10. 22, 서울
국적 한국
직업 외교관, 정치인,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현석(玄石)

요약 대한민국의 10대 대통령. 외무부 장관을 거쳐 1975년부터 국무총리로 재직하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자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으며, 같은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전두환 등 신군부의 압력으로 8개월 만에 사임했으며, 이후 정계와 거리를 두고 지내다가 2006년 타계했다.

목차

접기
  1. 정의
  2. 초기 생애
  3. 관료 생활
  4. 1979년 박정희 피격과 대통령 권한대행
  5. 대통령 재임 시기
    1. 제10대 대통령 선출
    2. 12·12 군사반란
  6. 대통령직 사임과 말년
최규하
최규하

정의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외교관, 정치가. 호는 현석(玄石)이다.

초기 생애

최규하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서 아버지 최양오와 어머니 이응선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최재민은 성균관 박사를 지낸 인물로, 최규하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최규하는 6살이던 1928년 원주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해 1932년 졸업했다. 서울에 있던 육촌 형의 도움으로 1932년 3월에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경성고보)에 입학했다. 경성고보 4학년 때인 1935년 부모의 뜻에 따라 17세의 나이로 홍병순의 셋째딸 홍기와 중매 결혼했다.

1937년 경성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갔다.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1942년 졸업한 뒤 만주로 건너갔다. 만주국 관리양성소인 대동학원에 입학해 정치행정을 전공하고 2년 뒤인 1943년에 졸업했다. 졸업후 잠시 만주국 관리생활을 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서울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교 조교수로 영문학을 3개월간 가르쳤다.

관료 생활

1946년 미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며 공무원이 되었고, 1937년 중앙식량행정처 행정실장이 되었다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농림부로 자리를 옮긴 최규하는 양정과장이 되었으며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는 농지관리국장 서리로 진급했다.

이 해에 최규하는 농림부차관 정흥구와 함께 싱가포르에서 열린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아시아 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외무부장관 변영태가 최규하를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했다. 이후 최규하는 외교관으로 오래 재직하게 되었다.

최규하는 1952년 7월 주일대표부 총영사에 임명됐고 1957년 5월 주일대표부 참사관이 되었다. 1958년 4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제4차 한일회담에 한국 측 대표 중 하나로 나가는 등 이승만 정부의 한일회담 실무에도 참여했으나, 배상 액수를 둔 양국간 입장 차이로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했으며 그해 귀국해 외무부차관에 발탁됐다. 1960년부터 외무부 장관 직무대행을 겸하다 1960년 4.19 시민혁명이 일어나자 5월 공직을 사임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1962년 외무부 장관의 고문이 됐다. 1963년 외무부 대사를 거쳐 국가재건최고회에서 박정희의 외교관련 업무를 조언하는 의장 외교 담당 고문이 됐다. 1963년 11월부터 2년 8개월 동안 말레이시아 대사로 근무하다가 박정희의 눈에 띄어 1967년 6월에 외무부장관에 발탁됐다.

최규하는 박정희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해 한미회담 실무를 맡았다. 또 당시 발생한 북한의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과 청와대 무장공비사건을 계기로 미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아내기도 했다. 대체로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며 실무에 있어서는 외교, 행정, 조직을 강화하고 통상외교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1년부터는 청와대의 외교 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됐다. 이때 최규하는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평양에 다녀오기도 했고,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서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24개국을 방문했다. 당시 박정희는 3선 대통령이 된 후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임명했으나 수차례 갈등을 빚은 뒤 후임으로 정치적 야심이 적은 최규하를 기용했다.

최규하는 국무총리 재직 중 근검절약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공식 회의석상에서 '부인 조심, 비서 조심, 자녀 조심'을 강조하며 공직자들의 청렴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1979년 3월 국무총리에 재임명됐다.

1979년 박정희 피격과 대통령 권한대행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가 김재규에 살해되자, 헌법에 따라 최규하가 10월 27일 새벽에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됐다. 그는 우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박정희 피살사건을 조속히 수사할 것을 지시했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계엄사령부 사령관이 되었고, 박정희 피살사건 조사 책임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육군소장 전두환이었다. 10월 28일 비상회의에서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소급해임했다. 최규하는 11월 3일 암살된 박정희의 빈소에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추서하고, 국장(國葬)을 결정, 박정희대통령국장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국장을 주관했다.

11월 6일 최규하는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해 유신 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대통령은 잔여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하여 제 11대 대통령 및 국회의원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재야는 유신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출은 있을 수 없으며, 민주헌법을 3개월 이내에 제정하고 빠른 시일 내에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1979년 11월 서울지역 대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유신헌법 철폐 시위가 시작됐다.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최규하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최규하

대통령 재임 시기

제10대 대통령 선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 6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10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단독 출마한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최규하는 96.7%(2,465표)의 득표율을 얻었고 84표의 무효표가 나왔다. 최규하는 한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당에 관여하지 않는 직업 공무원으로서 대통령이 된 첫번째 인물이었다

최규하는 대통령에 선출된 다음 날인 12월 7일 부총리 신현확을 총리로 지명하고, 국무회의에서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의결하고 1차적으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학생과 일반인 68명을 석방했다.

12·12 군사반란

최규하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전두환이 12·12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이끌던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불과 6일만인 12월 12일, 대통령 권한대행인 최규하의 재가 없이 부대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는 군사반란을 감행했고, 전두환은 이희승을 육군참모총장에 앉혀 군권을 장악했다.

군사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최규하는 12월 21일 취임식을 치렀으며, 긴급조치 관련자 561명을 특별사면하고, 1,330명을 석방했다. 취임사에서 그는 "현정부는 국난타개를 위한 위기관리 정부"라며 개헌 일정을 제시하고 조속한 선거 실시 등의 약속을 내놓았다. 당시 여야 의원 28명으로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개헌 작업을 진행 중이던 국회는 "유신잔당 정부에 개헌을 맡길 수 없다. 개헌 주도권을 국회에 넘겨라"고 반발했다.

1980년 2월 29일에는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윤보선과 김대중,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인사 687명에 대한 특별사면 및 복권조치도 시행했다. 1980년 4월 최규하는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강요에 따라 그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했다.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던 자리로 이 자리에 전두환을 임명한 것은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에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은 신군부의 퇴진과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이에 전두환은 5월 시국 수습책으로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최규하에게 강요했다. 최규하는 무력을 앞세운 전두환의 강요에 따라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전두환은 국회를 해산하고 김대중을 구속했으며, 김영삼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을 가택연금하거나 체포해 중앙정보부로 끌고 갔다.

김대중이 구속되자 5월 18일에 광주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고 전두환은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민들을 학살했다. 총기를 탈취하여 저항하던 시민들은 8일만에 진압됐고, 김대중은 내란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은 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기록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 신현확을 비롯해 국무위원 전원이 사직서를 제출하자 최규하는 당시 무역협회장이었던 박충훈을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했다. 개각 다음날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비상대책기구 설치를 요구했다. 5월 31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국보위는 대통령 자문 보좌기관으로 정식 발족되었으며, 실질적 권한은 전두환에게 있었다.

대통령직 사임과 말년

최규하는 당선된 지 8개월 여 만인 1980년 8월 16일에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최규하는 하야 성명에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한 정치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퇴임 후 최규하는 공식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최규하는 신군부의 반란사건과 관련해 여러차례 증언을 요청받았으나 끝까지 증언대에 서지 않았다. 1987년 5.18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때도 증언을 요청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김영삼 정부 때 진행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과 재판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995년 12.12 및 5.18 사건 수사 당시 최규하는 법정에 강제구인됐지만 증인선서 및 관련 증언을 모두 거부했다. 그는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 수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일일이 증명하거나 증언을 해야 한다면 국가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고 소명했다.

최규하는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쯤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고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옮겨진 후 7시 37분경 향년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서거 이후 최규하의 청렴한 면모가 다시 알려졌다. 그는 국무총리 시절 강원도 장성광업소에서 광부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73년 서교동 사저로 이사한 이후 서거할 때까지 연탄을 사용했으며, 고무신에 고무타이어를 붙여 신고 달력 이면지를 메모지로 사용하는 등 엄격할 정도의 청렴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고 최규하 전대통령 국민장 영결식
고 최규하 전대통령 국민장 영결식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뤄졌으며, 국민장 당일에는 2,000여 명이 참여했다.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됐다.

참고

  • ・ 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1: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년
  • ・ 대한민국 대통령실록, 박영규, 웅진지식하우스, 2014년
  • ・ <한겨레>, 최규하 단 한마디도 털어놓지 않은 대통령의 업보, 2015년 2월 13일
  • ・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78427.html#csidxadd2252eb583ee492670fbfc23b6da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