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경석

차경석

다른 표기 언어 車京石
요약 테이블
출생 1880, 전북 고창
사망 1936
국적 한국

요약 차경석은 증산교에 입문한 후 창시자 강일순의 수제자가 되었다가 그의 사후 교명을 보천교로 정하고 신자들로부터 천자로 받들어졌다.
초기에는 동학교도로서 동학운동에 가담했다. 1907년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일순을 만난 후 증산교에 입교했다. 1909년 강일순이 죽자 전국을 순회하면서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증산교의 교주가 된 고부인의 지도력 부족이 드러난 후 교단을 장악하고 교주가 되었다. 1920년부터 교단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1921년에는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경상남도 황석산에서 천제를 드렸다. 이때 국호를 '시국'이라고 했고, 교명을 '보화교'라고 정했다. 또 자신이 천자로 등극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 때 보천교의 교세는 매우 확대되어 간부급만도 50만 명을 넘었고 일반신도는 600만 명이 넘었다. 전시체제의 악화로 일제의 종교탄압이 강화되면서 교단 자체가 해체되었다.

호는 월곡. 초기에는 동학교도로서 동학운동에 가담했다가 동학이 천도교로 개편된 이후에는 전라도 순회관을 지내기도 했다.

1907년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일순을 만난 후 증산교에 입교했다. 그후 자신의 이종누이인 고판례를 강일순의 수부(교주의 부인)로 천거했다. 1909년 강일순이 죽자 전국을 순회하면서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1911년 강일순의 부인이자 자신의 이종누이였던 고부인이 증산탄신기념치성 도중 증산의 영(靈)에 감응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때 많은 교인들은 고부인에게 증산의 가르침이 이어졌다고 보고 고부인을 교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선도교라고 하는 증산교 최초의 교단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고부인은 새로 형성된 교단을 이끌 지도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차경석이 점차 교단을 장악해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1918년 많은 신도들이 고부인을 따라 교단을 탈퇴함으로써 차경석은 사실상의 교주가 되었다.

그는 1920년부터 교단을 재정비하기 시작하여 전국의 신도를 60방주로 조직하고, 스스로를 동방연맹의 맹주로 자처했다. 그리고 조선은 다가올 세계통일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경상남도 황석산에서 천제를 드렸다. 이때 국호를 '시국'이라고 했고, 교명을 '보화교'라고 정했다. 또 자신이 천자로 등극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차천자라고 불렀다.

1922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 보천교라는 간판을 달았다. 이때부터 교명이 보천교라고 알려졌다. 당시 보천교의 교세는 매우 확대되어 간부급만도 50만 명을 넘었고 일반신도는 6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처럼 교세가 커지자 일제는 보천교에 대한 감시와 회유책을 병행했다. 그 결과 보천교 내에는 시국대동단이 조직되어 친일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일제의 논리인 대동아 단결을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그후 전시체제가 더욱 악화되면서 일제의 종교탄압이 강화되었다. 이때 나온 유사종교해산령에 의해 보천교도 교단 자체가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