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정주영

다른 표기 언어 鄭周永 동의어 아산, 峨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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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5. 11. 25, 강원 통천
사망 2001. 3. 21, 서울
국적 한국

요약 정주영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으로 출발하여 한국 최대의 재벌이 된 인물이다.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여 최초 국산 모델인 포니를 개발했고, 한국업체 처음으로 해외건설에 진출하여 ‘중동 붐’을 일으켰다. 정치인으로 변신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37년 9월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지속적으로 사업 영역과 규모를 확장하여 1971년부터 현대그룹 회장을 지냈다. 한국전쟁은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전시에 그는 미군이 발주하는 긴급공사를 대거 수주했고, 전후에는 파괴된 국내 사회간접시설 복구 사업을 맡아 비약적으로 회사를 키웠다.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1976년에는 최초의 국산 자동차 모델인 포니 개발에 성공했다. 1992년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고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켰다.

정주영(鄭周永)
정주영(鄭周永)

1930년 송전소학교를 졸업했으며, 막노동으로 출발하여 한국 최대의 재벌이 된 인물이다. 1937년 9월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1940년 아도서비스공장 대표, 1950년 현대건설(주) 및 현대상운(주) 사장 등을 거쳐, 현대가 그룹체제로 전환한 1971년부터 현대그룹 회장을 지냈다.

한국전쟁은 정주영에게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전시에 그는 미군이 발주하는 긴급공사를 대거 수주했고, 전쟁 이후에는 도로·교량·항만 등 파괴된 국내 사회간접시설 복구 사업을 떠맡아 비약적으로 회사를 키웠다. 1961년 군사정부의 수립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본격 추진되면서 그의 회사는 더욱 번성했다.

1965년 그는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려 한국업체로는 처음으로 해외건설에 진출했는데, '중동 붐'을 일으키며 오일 달러를 벌어들였다.

정주영은 1960년대 중반부터 건설업 외에 다른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66년에는 자동차 산업으로 뛰어들었다. 미국 포드자동차회사와 합작했던 그는 포드사와 결별하고 국산 고유 모델 생산에 나섰다.

1976년 마침내 최초의 국산 모델인 포니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1986년에는 자동차의 본고장인 미국 시장에 차를 수출했다. 이밖에도 그는 조선·전자·중화학·금융업 등 거의 모든 업종에 진출해 현대그룹을 성장시켰다. 1977년부터 한국 재계를 이끄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5번 연임하기도 한 그는 1987년 현대그룹 회장직을 동생인 정세영에게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1992년 정주영은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그해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 후보에 이어 3위로 낙선했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현대그룹은 정권과 불편한 관계에 놓였다.

그는 그룹경영에서 공식적으로는 완전히 손을 떼고 5년간 칩거나 다름없는 생활에 들어갔다. 그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조용한 시기였다.

정주영은 1989년 1월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과 금강산 개발사업 의정서 등을 체결했으나 그후 남북간 긴장이 높아지면서 대북사업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1998년대북 정경분리 원칙 및 대북 포용 정책을 들고 나온 김대중 정부의 등장은 그의 대북사업에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결국 정주영은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 방문길에 올랐다. 그는 분단 이후 정부관리의 동행 없이 판문점을 통과한 최초의 민간인으로 기록되었다. 특히 그는 '통일 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후 몇 차례 더 방북하며 남북 민간교류의 획기적 사건인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켰다. 저서로는 〈아산 정주영 고희기념 연설문집〉·〈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