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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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8. 8. 27, 평북 의주
사망 1975. 8. 17, 경기 포천
국적 한국

요약 1953년부터 월간 <사상계>를 발행, 지속적으로 자유·민주·통일·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독재로 치닫는 박정희정권과 맞섰고, 1975년초에는 민주회복을 위한 범민주세력의 단합을 강력히 촉구, 재야세력의 확고한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62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1944년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영, 1945년 1월 광복군에 가담했고,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수행원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의원 비서 등을 역임했다.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독재에 항거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975년 의문사했다.

장준하(張俊河)
장준하(張俊河)

기독교 목사인 장석인과 김경문 사이에서 4남 1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44년 6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곧 탈영하여 중국군에 편입된 후 바로 김준엽 등과 함께 충칭[重慶]으로 가서 1945년 1월 광복군에 가담해 광복군 대위가 되었고, 1945년 8월 중국 시안[西安]에서 미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수행원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의원 비서 등을 역임했고, 19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지속적으로 자유·민주·통일·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1962년 8월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을 수상했고, 1967년 3월 야당통합을 위한 4자회담을 주선하여 통합을 이루어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으며 그해 6월 옥중출마로 서울 동대문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2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가했고,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에 피임되었다. 1973년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 인 서명운동'을 주도했으며,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974년 4월 15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2월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 후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해 다시 박정희정권과 맞섰고, 1975년초에는 민주회복을 위한 범민주세력의 단합을 강력히 촉구, 각계에서 그의 호소에 동조하는 성명이 잇따르면서 재야세력의 확고한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저서로 〈돌베개〉가 있다.→ 사상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