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동조론

일선동조론

다른 표기 언어 日鮮同祖論

요약 '일본과 조선의 조상은 같다'는 이론. 조선 강점 이후 기다 사다기치는 〈일선양민족동원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연구를 통해 유물·언어·신화·풍습 등 다방면에서 조선과 일본 민족이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과 일본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피를 나눈 근친관계에 있고 태고 이래 조선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가부장적 지배가 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조선은 일본에 흡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일제의 조선 강점을 합리화했다. 일선동조론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 밑에서 강조된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통해 정책적으로 한층 심화되었으며, 만주사변 이후 한국민에게 강요된 창씨개명 등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민족말살정책도 여기에서 기인되었다.

목차

접기
  1. 일선동조론의 발생과 내용
  2. 일선동조론의 기능

일선동조론의 발생과 내용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부터 침략주의 정객들에 의해서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났으며 침략주의 어용사학자들에 의해서는 일선동조론·만선사관·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남조선경영설(南朝鮮經營說) 등이 만들어졌다. 그중 일선동조론은 한국고대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과 일본은 같은 민족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합리화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도쿄제국대학 교수들에 의해 저술되고 이후 일본사 교육의 중요한 저본(底本)이 된 〈국사안 國史眼〉(1901)에서 고대의 한일관계가 동조론의 입장에서 서술됨으로써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것을 합리화하는 사론으로서 강조되었다.

조선 강점 직후에 일본역사지리학회 기관지인 〈역사지리〉는 당시 일본의 역사학자 대부분을 동원해 임시증간호로서 '조선호'를 발간했는데 그들이 쓴 글은 모두 일본의 조선합병에 대한 동조론을 근거로 예찬했다. 그 집필자의 하나인 기다 사다기치[喜田貞吉]는 〈일본민족이란 어떤 것인가?〉·〈한국민족이란 어떤 것인가?〉·〈한국병합과 역사〉 등의 글을 발표해 이 논문들 속에서 일선동조론에 대하여 언급했다. 그리고 서울의 동원사(同源社)에서 발행하는 〈동원 同源〉이라는 잡지 제3호에(1919년 12월호) 〈일선양민족동원론의 경개 日鮮兩民族同源論の梗槪〉라는 제목으로 앞의 논문들을 종합하여 발표했다.

기다 사다기치는 다시 이글을 증보하여 자신이 주필로 있는 잡지 〈민족과 역사〉 제6권 1호에 〈일선양민족동원론 日鮮兩民族同源論〉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기다 시다기치는 이상의 논문에서 고문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유물·언어·신화·풍습 등 다방면에서 조선과 일본의 양 민족이 동원·동종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동원동조론(同源同祖論)은 임나 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남조선경영설에 뒷받침되어, 태고 이래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는 침략적 우월성을 근거하고 있었다. 조선과 일본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피를 나눈 근친관계에 있고 태고 이래 조선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가부장적 지배가 가능한 것이라면, 조선은 이제 일본에 대해 외국·외민족은 될 수 없으므로 일본에 흡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일제의 조선 강점을 합리화했다.

일선동조론의 기능

일선동조론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 밑에서 강조된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통해 정책적으로 한층 심화되었으며, 만주사변 이후 한국민에게 강요된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과 민족말살정책도 그 연원은 여기에 귀착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제의 침략이 만주와 중국대륙까지 뻗치게 되자 확대·발전하여 만주·몽골의 제민족도 포함시켜 그곳에 대한 침략마저 정당화하려 한 대아세아주의(大亞細亞主義)와도 밀접히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