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네스코

이오네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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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2. 11. 26, 루마니아 슬라티나
사망 1994. 3. 28, 프랑스 파리
국적 루마니아/프랑스

요약 이오네스코는 단막으로 된 '반연극' <대머리 여가수>(1949)로 희곡기법에 혁명을 일으켰고, 부조리 연극의 출현에 기여했다.
1945년 이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영어공부를 하던 교과서의 진부한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대머리 여가수>를 이루는 무의미하고 진부한 말들의 목록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연극의 가장 유명한 장면은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날씨, 사는 곳, 자녀 수 따위의 진부한 대화를 나누다가 실제로는 남편과 아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그가 되풀이하여 다룬 자기 소외와 의사 전달의 어려움이라는 주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이다. 후기에는 단막극을 통해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를 다루었는데 <수업>(1951), <의자>(1952) 등은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장막극 중 <공중 산책자>(1963)는 철학적 환상이 번득이는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단막으로 된 '반(反)연극' 〈대머리 여가수 La Cantatrice chauve〉(1949)로 희곡 기법에 혁명을 일으켰고, 부조리 연극의 시발에 기여했다.

1970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뽑혔다. 유년시절을 프랑스에서 지냈고 1925년에 루마니아로 돌아갔다. 부쿠레슈티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여 학위를 딴 뒤 파리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했고(1939), 1945년 이후 파리에 정착했다. 교정 담당자로 일하는 동안 영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가 공부한 영어 교과서는 문법을 철저히 지켜서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웠는데, 바로 이 교과서의 진부한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대머리 여가수〉를 이루는 무의미하고 진부한 말들의 목록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연극의 가장 유명한 장면은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날씨, 사는 곳, 자녀 수 따위의 진부한 대화를 나누다가 실제로는 남편과 아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그가 되풀이하여 다룬 자기 소외와 의사 전달의 어려움이라는 주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이다.

그는 〈대머리 여가수〉의 '반논리적' 개념을 발전시켜서 연이어 수많은 희곡을 써냈다. 작품들 중에는 짤막하고 지나치게 불합리한 소품도 있지만, 좀더 정교하게 다듬은 일련의 단막극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후기에 다룬 주제들, 특히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는 대부분 이 단막극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 가운데 〈수업 La Le이미지on〉(1951)·〈의자 Les Chaises〉(1952)·〈새로 온 하숙인 Le Nouveau Locataire〉(1955) 등은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장막극 기법을 익히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아메데 Amédée〉(1954)·〈무보수 살인자 Tueur sans gages〉(1959)·〈코뿔소 Le Rhinocéros〉(1959) 등 장막극은 극적 통일성이 부족하지만, 〈왕이 죽다 Le Roi se meurt〉(1962)에서는 마침내 이 통일성을 획득했다.

이 성공에 뒤이어 발표된 〈공중 산책자 Le Piéton de l'air〉(1963)는 철학적 환상이 번득이는 작품으로서,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극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갈증과 허기 La Soif et la faim〉(1966)를 통해 좀더 단편적인 구성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그후 10년 동안 그는 〈살인 놀이 Jeux de massacre〉(1970),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Macbeth〉를 개작한 〈막베트 Macbett〉(1972), 〈아수라장 Ce formidable bordel〉(1973)을 썼다.

오랜 작가 생활 동안 수필과 아동용 교과서 및 〈외로운 남자 Le Solitaire〉(1973)라는 소설도 썼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추상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다양한 기법을 널리 보급하고, 연극계의 자연주의적 인습에 길들여 있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런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다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신랄한 독설을 잘 퍼붓는 훌륭한 비평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평론집으로는 〈논평과 반론 Notes et contre-notes〉(1962)이 있다. 후기 작품들에서는 지적 모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꿈과 환상 및 잠재의식의 탐구에 더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의 염세주의는 〈왕이 죽다〉 이후 약간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정치적 입장은 완고해져, 초기에는 '우익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했지만 〈단편적 일기 Journal en miettes〉(1967)에서는 모든 종류의 좌익 이데올로기에 반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