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농

이농

다른 표기 언어 rural exodus , 離農

요약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인구 유출은 봉건사회에서도 있었으나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즉 자연재해나 봉건적 착취 등으로 인해 생활터전을 잃어버린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되는 식이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이농은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과정에서 일어났는데 산업혁명 또는 공업화와 더불어 노동력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농의 원인에 대해서는 농민이 농업 내부에서 존립하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압출요인과 농민을 농업 외부에서 끌어내는 흡인요인으로 구분하여 파악해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두 요인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이농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생활수준·문화복지·교육기회·의료혜택의 차이 등과 같은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역사
  3. 원인
  4. 한국의 이농
    1. 역사
    2. 형태
    3. 결과

개요

농촌주민의 도시로의 이동, 농가인구의 비농가로의 전환, 농업인구의 비농업인구화 등 서로 구별되면서도 중첩되는 현상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농가·농촌·농업으로부터의 인구유출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역을 기준으로 한 도시와 농촌 간의 인구이동, 가구의 성격을 기준으로 한 농가와 비농가 간의 인구이동, 직업을 기준으로 한 농업인구와 비농업인구 간의 노동력 이동 등으로 엄밀하게 규정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역사

자본주의사회 이전의 봉건사회에서도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인구 유출은 있었다.

즉 자연재해나 봉건적 착취 등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몰락한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유리되어 유망(流亡)하는 현상이 널리 일어났으며,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이를 기초로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여 도시가 형성됨으로써 유망민(流亡民)이나 인근의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봉건사회에서는 농민이 토지에 긴박되고 공동체적 규제하에 묶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공업이나 도시의 발전도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농은 제한적이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이농은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과정에서 자본축적과의 관련 속에서 일어난 농촌인구의 도시로의 유출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촌향도 현상).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의 형성기에 해당하는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에서 농민의 이농은 생산수단인 토지와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농민이 토지로부터 분리되어 임노동자로 전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농민 노동력의 사회적 이동과정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농이 본격화된 시기는 자본주의 형성기라기보다는 자본주의 발전기라고 할 수 있다. 즉 각 나라에서 산업혁명 또는 공업화가 어느 정도 수행되어 도시에서 대공업이 발달했고 그 결과 농민의 부업적 생산부문이었던 농촌가내공업이 줄어들고 반면 도시에서는 노동력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을 배경으로 농민의 도시로의 이농이 대규모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인

일반적으로 이농의 원인에 대해서는 농민이 농업 내부에서 존립하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압출요인(push factor)과 농민을 농업 외부에서 끌어내는 흡인요인(pulling factor)으로 구분하여 파악해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양자를 엄격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양 요인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이농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격차, 농가경제의 악화, 도시취업기회의 증대 등과 같은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생활수준·문화복지·교육기회·보건·건강·의료혜택의 차이 등과 같은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이농

역사

한국의 경우에는 일제시대부터 이농이 널리 일어났다. 농민들은 식민지 농업정책의 가혹한 수탈과 반봉건적 지주제의 억압하에서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이농했다. 또한 이촌하는 경우에도 도시의 근대적 산업부문에 취업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제한되고 도시의 잡업층이나 상업부문, 또는 화전민·농업노동자·유망민 등으로 흡수되거나 국외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촌한 농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만주·중국·일본 등 국외로 이주했다.

8·15해방 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초에도 농촌경제의 피폐로 인한 이농은 계속되었으나, 본격화된 시기는 1960년대 후반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부터이다. 1960년대 후반 수출지향적 공업화의 본격적인 추진에 따른 비농업 부문의 고용기회 확대와 도시·농촌 간 소득격차의 심화, 농민층의 분해 등이 대규모의 이농을 초래했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의 급격한 이농의 결과 그동안 줄곧 증가해오던 농가인구와 농가호수도 1967년의 1,607만 8,000명과 258만 7,000호를 정점으로 그후 감소했다.

농가인구의 유출을 통해 시기별로 이농의 추이를 보면, 1970년대 전반에는 농가경제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이농이 다소 진정되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외국농산물의 수입과 농업위기의 심화 등으로 인해 농가인구의 유출률이 한층 높아졌다.

형태

이농의 형태는 전가족이농과 부분가족이농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농의 형태별로 이농인구의 비중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대체로 1960년대 후반에는 영세농층을 중심으로 한 전가족이농의 비중이 높았으나, 그 이후에는 전가족이농 인구의 비중이 점차 낮아지고 부분가족이농의 비중이 높아져왔다고 할 수 있다. 즉 1960년대 후반의 이농이 주로 농가로서의 존립기반이 무너진 영세소농의 전가족이농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1970년대 이후에는 젊은 연령층을 중심으로 농가의 전계층에 걸쳐 부분가족이농이 크게 증가했다.

1980년대에는 대체로 농가 호당 평균 1명의 미혼 비동거가족이 있을 정도로 부분가족이농이 많았다.

결과

이러한 농가인구의 급격한 이농현상은 첫째, 인구의 도시집중과 도시의 주택·교통·빈민 문제 등 도시문제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둘째, 농업노동력의 양적 감소와 노령화·여성화라는 질적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농업생산력의 주체를 약화시킨 반면 농업기계화를 촉진했으며, 셋째, 농촌지역의 인구 감소와 함께 지역에 따라 심각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낳았고, 넷째, 이농한 사람들이 농지를 상속받거나 이농민이 농지를 계속 보유함으로써 비농민 소유의 농지를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