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

의자왕

다른 표기 언어 義慈王 동의어 해동증자, 백제 제 31대왕, 부여의자, 扶餘義慈, 海東曾子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한국, 백제
출생지 사비

요약 백제의 제 31대왕으로 나당연합군에 패해 백제의 멸망을 맞은 마지막 왕. 의자왕은 즉위 초에는 왕권강화에 노력했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대외정책을 폈으나, 말년의 무절제한 생활로 지배체제 균열을 초래하면서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을 맞았다. 무왕의 맏아들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력이 있었다. 632년(무왕 33)에 태자가 되었으며,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해동증자'라고 불렸다.

무왕의 맏아들이다.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력이 있었다. 632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해동증자'라고 불렸다.

즉위한 뒤 무왕대에 다져진 기반 위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 변혁을 단행했다.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의하면 동생의 아들 교기를 비롯하여 모매여자 4명과 내좌평 기미 등 귀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했다. 이는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을 유지하려는 세력을 제거한 조치로 짐작된다. 654년(의자왕 14)에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하고, 657년에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식읍을 준 조치 등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니혼쇼키(日本書紀)
니혼쇼키(日本書紀)

즉위 직후에는 당에 유화적인 정책을 폈으나 곧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신라를 견제했다. 이는 연개소문의 집권 후 고구려가 당에 강경노선을 취하고, 신라와 당의 관계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러 번 군사를 내어 신라를 공격했고, 변경의 많은 성을 빼앗았다. 특히 642년 7월에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항복시켰고, 같은 해 8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시켜 대야성을 공격하여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의 가족을 몰살시켰다. 또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여 신라와 당의 교통로를 끊으려 했고, 645년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신라의 7성을 빼앗았다.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는 등 신라에 대해 시종 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말년에 들어 강화된 왕권을 배경으로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이 이어지면서 지배체제 내부의 균열을 초래했다.

〈니혼쇼키〉에 인용된 〈일본세기 日本世記〉에 의하면 궁중 내에서는 무도한 군대부인이 권세를 잡고 현량을 살해했다고 한다. 또한 향락을 만류하던 좌평 성충을 옥사시키는 등 신하들의 언로도 봉쇄했다. 〈삼국사기〉에는 만년에 자주 재이가 나타난 사실을 적어, 잦은 군사동원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국왕이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던 백제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 침략에 여러 번 실패한 은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소정방(蘇定方)의 당군이 바다를 건너 백강 입구로 거슬러오고,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은 육로로 탄현을 넘어 진격해왔다. 백강에서 당군을 막던 백제군은 크게 패했고, 황산에서 신라군을 막던 계백의 5,000명의 결사대도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수도인 사비성이 포위되자 태자 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난했다가 곧 항복했다. 백제가 멸망한 후 왕자들과 대신·장사 88명을 포함하여 백성 1만 2,000명과 함께 당으로 압송된 후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