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저

옥저

다른 표기 언어 沃沮

요약 함경남도 북부에서 함경북도 남부의 해안지대를 동옥저라 불렸고, 두만강 하류와 간도지방을 북옥저라 했다. 해안평야지대에 위치하여 오곡이 생산되고 해산물이 풍부한 지역조건을 지니고 있었으나 주변에 강대한 세력들이 있어 잇달아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옥저는 고구려·동예와 같은 종족으로, 언어·음식·의복·가옥·예절 등이 고구려와 유사한 점이 많았으며 사회발전단계는 동예와 비슷했다.
3세기 전반경의 인구가 5,000여 호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던 옥저는 비옥한 자연조건에도 불구하고 통일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옥저에 대한 고구려의 직접지배가 가능해지면서 역사적 실체로서의 옥저는 소멸되었다.

대개 함흥을 중심으로 함경남도 북부에서 함경북도 남부의 해안지대에 거주하던 집단은 동옥저(東沃沮)라 불렸고, 두만강 하류와 간도(間島)지방에 살았던 집단은 북옥저(北沃沮)라고 했다.

삼한
삼한

일반적으로 옥저라고 할 때에는 동옥저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해안을 따라 동북으로 길게 뻗은 해안평야지대에 위치하여 오곡이 생산되고 해산물이 풍부한 지역조건을 지니고 있었으나 주변에 강대한 세력들이 있어 잇달아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BC 3세기초까지 이곳은 임둔국(臨屯國)의 일부였으며 임둔국이 위만조선에 의해 복속되자 그 지배를 받았다.

고조선이 한(漢)에 의해 멸망되자 BC 108년에는 그 일부가 임둔군에, BC 107년에는 현도군에 편입되어 한군현의 지배를 받았다. BC 75년에 현도군세력이 서북으로 후퇴하자 일부는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에 편입되고 나머지 지역은 자립했다. 1세기를 전후하여 낙랑군의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부조현(夫租縣)을 중심으로 점차 독자적인 성장을 꾀하면서 이 지역은 옥저로 불리게 되었다. 30년경 후한(後漢)의 지원 아래 일시적으로 세력을 회복한 낙랑군에 의해 일부지역이 군(郡) 직속의 현으로 편제되지만 곧이어 개마고원을 넘어온 고구려에 예속되어 그의 간접지배를 받게 되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옥저는 고구려·동예와 같은 예맥 계통의 종족으로, 언어·음식·의복·가옥·예절 등이 고구려와 유사한 점이 많았으며 사회발전단계는 동예와 비슷했다.

대군장 없이 읍락별로 나뉘어 살았으며 읍락에는 소와 말이 적었다. 매매혼의 성격을 띤 민며느리제가 있었으며,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으로 덮어 가매장했다가 시체가 썩은 뒤 남은 뼈만 추려 나무덧널에 넣어 장사지내는 복장(複葬)의 풍습이 있었다. 장례에 사용하는 나무덧널은 길이가 10여 장(丈)에 이르는 긴 것으로 덧널의 한쪽 면에 입구를 만들어 한 집안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무덧널 옆에는 죽은 사람의 모습을 새긴 나무인형을 만들어 놓아 나무인형의 숫자로 나무넛덜 속에 있는 죽은 사람 유골의 수를 헤아릴 수 있게 했다. 나무덧널의 입구에는 쌀을 담은 그릇을 매달아놓아 죽은 사람의 양식으로 삼았다. 나무덧널을 함께 쓰는 '한 집안'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여러 세대에 걸친 대가족이거나 비슷한 규모의 친족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옥저는 고구려에 예속된 뒤, 초기에는 고구려인 대가(大加) 밑에 각 읍락의 장(長)이 사자(使者)가 되어 공납을 바치는 간접지배를 받았다. 고구려에 대한 공납물로는 맥포(貊布)·생선·소금과 기타 해산물 등이 있었으며, 때로는 여자를 바쳤는데 그들은 고구려 귀족의 첩이 되기도 했다. 옥저의 읍락민들은 고구려에 의해 일종의 예민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3세기 전반경의 인구가 5,000여 호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던 옥저는 비옥한 자연조건에도 불구하고 통일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고조선·한군현·고구려 등 주변세력의 지배를 번갈아 받은 까닭에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족장층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일반민과 함께 읍락에 섞여 사는 등 뚜렷한 사회분화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사회 전체가 공동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244년 위(魏)와의 전쟁에 패한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의 뒤를 쫓아 옥저로 진격해온 위군에 의해 다수의 읍락이 유린되었다. 이로 인해 읍락을 단위로 한 공동체의 해체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옥저에 대한 고구려의 지방편제가 보다 손쉬워져 고구려의 직접지배가 가능해지면서 역사적 실체로서의 옥저는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