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

제인 오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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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출생 1775. 12. 16, 잉글랜드 햄프셔 스티븐턴
사망 1817. 7. 18, 햄프셔 윈체스터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작가. 일상 속의 평범한 사람들을 다룸으로써 현대적 성격을 지닌 소설을 최초로 썼다. 대표작으로 <오만과 편견>, <노생거 수도원>, <설득> 등이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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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장과정
  2. 문학적 발전
  3. 평가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제인 오스틴(Jane Austen)

〈분별과 다감(多感) Sense and Sensibility〉(1811)·〈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1813)·〈맨스필드 공원 Mansfield Park〉(1814)·〈에마 Emma〉(1815)·〈노생거 수도원 Northanger Abbey〉(1817, 사후 출판)·〈설득 Persuasion〉(1817) 등의 소설에서 당시 영국 중산층의 풍속희극을 창조해냈다.

성장과정

제인 오스틴은 아버지 조지 오스틴 목사의 교구인 햄프셔의 스티븐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들 6명과 딸 2명 중 7번째이자 둘째 딸인 그녀는 언니 캐산드라와 가장 친했는데, 두 자매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정규교육은 1782년경 언니와 함께 옥스퍼드에 가서 콜리 부인이라는 사람에게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1783~84년경에 레딩의 애비 스쿨로 옮겨가 1787년경까지 다녔으며, 그뒤에는 계속 집에서 교육받았다. 아버지는 성직자가 되기 전에 옥스퍼드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펠로가 되었으며, 자식들이 학문을 사랑하도록 장려했다.

어머니 캐산드라(결혼 전 姓은 리)는 재치있는 여성으로, 시와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지어내는 재주로 유명했다. 이 대가족이 즐긴 오락은 연극이었다. 오스틴 일가와 그 이웃들은 스티븐턴 극단을 만들어, 여름휴가 때는 목사관 헛간을 소극장으로 개조해 연극을 공연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집에서 공연했다. 공연작품에는 제한이 없었으며, 18세기 희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제인 오스틴의 어린시절은 결정적인 사건 없이 당시의 사회적·정치적 격변과도 떨어져 있었지만, 활기차고 애정이 넘치는 집안 분위기는 그녀의 창작을 자극했다.

그녀에 대한 최초의 낭만적 소문은 1796년초 스티븐턴 이웃 마을 목사의 조카로 잘생긴 아일랜드 청년 톰 러프로이와의 연애담이었다. 1798(또는 1799)년 그녀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이매뉴얼 칼리지 학생으로 당시 러프로이 가족과 함께 지내던 새뮤얼 블래컬의 구혼을 거절했던 것 같다.

더욱이 멀리 사는 친척이나 친구들과도 연락을 하고 지냈기 때문에 그녀의 경험은 스티븐턴 교구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이 마을과 이웃에 사는 소지주, 시골 목사, 가끔씩 하는 바스·런던 여행 등이 소설의 배경·등장인물·소재로 사용되었다.

문학적 발전

오스틴이 처음으로 글을 쓴 것은 1787년경이며, 그때부터 1795년까지 쓴 많은 글은 〈제1권 Volume the First〉·〈제2권 Volume the Second〉·〈제3권 Volume the Third〉 등의 필사본 노트에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3권의 노트에는 희곡·운문·단편소설·산문 등 모두 21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 작품들은 분석적인 사고로 기존의 문학형식, 특히 감상적인 소설을 풍자하는 경향을 보인다. 혈기 넘치고 절제가 안 된 초기 글과는 달리 1793~94년경에 쓴 서간체 단편소설 〈레이디 수잔 Lady Susan〉에서는 훨씬 진지한 인생관을 보여주었다.

강한 정신력과 개성을 지나치게 발휘하여 마침내 사회적으로 자기파멸에 이른 한 여성을 그려낸 이 작품은 사실상 강하고 '남성적인' 여성의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여성이 겪는 좌절과 숙명을 그려낸 것이다.

1802년 11월에는 햄프셔 집안의 상속자인 21세의 해리스 빅 위더와 결혼하는 데 동의했으나, 다음날 아침 마음을 바꾸었다. 그뒤에도 사랑에 빠졌으나 얼마 안 가 애인이 죽었다고 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사랑과 결혼을 깊이 다룬 까닭에 이러한 관계의 진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으나, 불행하게도 증거가 불충분하다. 언니 캐산드라는 제인의 사생활을 세심하게 보호했으며, 제인이 죽은 뒤 다른 가족과 함께 제인의 편지를 검열하여 많은 양을 없애버렸고 일부를 흐트러놓았다.

가족의 비망록과 기록된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으며, 제인 자신이 쓴 편지에는 항상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내용을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소설에는 제인이 사랑과 실연의 체험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이 점은 마지막 소설 〈설득〉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연애를 하던 중에 쓴 그 이전의 소설에도 나타난다. 첫 소설 〈분별과 다감〉은 1795년경 여주인공들의 이름을 딴 〈엘리너와 매리앤 Elinor and Marianne〉이라는 제목의 서간체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1796년 10월과 1797년 8월 사이에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의 초판을 완성했는데, 그 당시의 제목은 '첫인상'(First Impressions) 이었다. 1797년 11월 아버지가 런던의 출판업자 토머스 캐덜에게 이 책의 출판 가능성을 묻는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 초기 소설 가운데 가장 나중에 쓴 〈노생거 수도원〉은 '수잔'(Susan)이라는 제목으로 1798(또는 1799경)년경에 씌어진 것 같다.

이때까지 스티븐턴 목사관에서의 생활상은 제인 오스틴이 소설가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가족은 작품을 감상할 줄 아는 독자였다. 다양한 성격의 이웃이 있었으며, 친구나 친척 또는 결혼한 오빠들 집에서 오랫동안 지낸 뒤에 돌아올 수 있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다. 부유한 사촌의 상속자로 입양된 셋째 오빠 에드워드는 켄트 주 가드머셤에 있는 집을 누이들에게 개방했고, 나중에는 어머니가 없는 11명의 조카들을 돌보며 놀게 했다. 런던에 사는 헨리도 제인과 언니를 자주 초대했다. 이러한 안정된 생활은 1801년 70세가 된 아버지가 교구 일을 장남 제임스에게 물려주고 아내와 딸들을 데리고 바스로 은퇴하면서 막을 내렸다.

제인 오스틴은 8년 동안 바스·런던·클리프턴·워릭셔 등지를 계속 옮겨다니는 생활을 감수해야 했고, 1805~09년에는 사우샘프턴에서 지냈다.

1803년 '수잔'의 원본이 출판업자 리처드 크로스비에게 10파운드에 팔렸다. 크로스비는 곧 출판할 생각으로 원고를 샀지만, 광고까지 나왔는데도 무슨 까닭인지 출판하지 않았다. 1804년 오스틴은 〈윗슨가(家) Watsons〉를 쓰기 시작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이 작품은 슬픈 내용으로, 사회상이 암울하며 이 작품의 여주인공은 오스틴의 작중인물 중 가장 큰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이 작품의 풍자는 그 날카로움이 잔인할 정도이며 실연을 당하고 그밖의 슬픈 일도 겪은 까닭인지 작품에서 관대함이 사라지고 창의성도 떨어진 흔적이 역력하다. 1804년 12월 가장 친한 친구 앤 러프로이 부인이 갑자기 죽었고, 1805년 1월 21일에는 아버지가 바스에서 죽었다.

평가

마침내 1809년 오빠 에드워드가 스티븐턴에서 멀지 않은 햄프셔 초턴에 어머니와 누이들이 지낼 큰 집을 마련해주었다.

사우샘프턴에서 함께 지내던 친한 친구도 이곳에서 같이 살았다. 초턴에 정착하게 된다는 전망만으로도 제인 오스틴은 새로운 목적의식을 얻을 수 있었다. 4월에 크로스비에게 편지를 써서 '수잔'에 대한 그의 의사를 타진했고, 초턴의 집에 이사한 뒤에는 〈분별과 다감〉·〈오만과 편견〉을 출판할 준비를 했다. 2년 뒤 토머스 에저턴은 손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저자의 보증을 받고서야 〈분별과 다감〉을 출판하는 데 동의했다.

이 작품은 1811년 11월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주요평론지 〈크리티컬 리뷰 Critical Review〉·〈쿼털리 리뷰 Quarterly Review〉는 이 소설이 교훈과 즐거움을 동시에 맛보게 해준다고 호평했다. 한편 1811년 2월 〈맨스필드 공원〉을 쓰기 시작하여 1813년 여름에 끝마쳤고 1814년에 출판했다. 이무렵에는 비록 익명이긴 하지만 작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에저턴은 〈오만과 편견〉을 1813년 1월에 출판했고 11월에는 〈오만과 편견〉·〈분별과 다감〉의 재판이 나왔다. 오스틴은 1814년 1월과 1815년 3월 사이에 〈에마〉를 써서, 1815년 12월에 출판했다.

1816년 2월에는 〈맨스필드 공원〉의 재판이 나왔는데, 이 작품은 〈에마〉와 마찬가지로 제인 오스틴을 "물론 악한이지만 예의바른 사람"이라고 표현한 존 머리가 출판했다. 1815년 8월부터 1816년 8월 사이에 쓴 〈설득〉은 〈노생거 수도원〉과 함께 1817년 12월 그녀가 죽은 후에 출판되었다.

1811년 이후는 그녀의 일생중 가장 보람있었던 시기인 것 같다.

그녀는 작품이 출판되어 호평을 받고 소설이 널리 읽히는 데 만족했다. 평론가들은 소설의 도덕적인 면과 인물묘사를 높이 평가했으며, 당시 유행하던 낭만적 멜로드라마와는 달리 가정을 소재로 한 사실주의를 참신한 것이라고 환영했다. 죽기 전 마지막 18개월 동안에도 오스틴은 글쓰기에 바빴다. 1816년초 벌레스크 〈소설의 구상 Plan of a Novel, According to Hints from Various Quarters〉(1871 초판)을 쓰기 시작했으며, 1816년 8월까지 〈설득〉의 집필에 몰두하는 한편 당시 'Miss Catherine'으로 제목을 바꾼 '수잔'(〈노생거 수도원〉)의 원고를 다시 검토했다.

오스틴은 1817년 1월 마지막 작품이 된 〈샌드턴 Sanditon〉(가족들이 붙인 제목)을 쓰기 시작하여 8주도 되기 전에 2만 4,000단어 이상을 쓰고 수정했다.

1816년초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간에 쫓긴 나머지 그해 3월 18일 이 원고에서 손을 떼었다. 오스틴은 자신이 울화증에 걸렸다고 여겼으나, 현대의학에 근거해 그 증세를 보면 애디슨병을 앓았던 것 같다. 그녀는 〈샌드턴〉에 마지막 힘을 쏟아부은 듯, 이 작품에는 휴양지와 병약함에 대한 거칠고 자조적인 풍자가 담겨 있다.

4월에 유서를 쓴 뒤, 5월에 외과전문의의 치료를 받기 위해 윈체스터로 갔다. 7월 18일 새벽 4시 30분에 숨을 거둔 오스틴은 6일 뒤에 윈체스터 대성당에 묻혔다. 익명으로 출판된 작품의 원작자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사실은 주로 오빠 헨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헨리는 〈노생거 수도원〉과 〈설득〉의 출판을 감독했으며, 〈작가의 전기 사항 Biographical Notice of the Author〉을 썼다. 그는 누이 제인의 마음씨와 지성에 찬사를 보냈으며, 그녀가 죽으면서 마지막 소원을 묻는 질문에 "그녀답게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간단하면서도 예의바르게 답했다"고 기록했다.

그녀가 생애에 이룩한 업적에 걸맞는 평가를 내린 사람은 월터 스콧 경뿐이었다.

그는 1816년 3월 〈쿼털리 리뷰〉에 실은 〈에마〉의 평론에서, 이 '이름없는 작자'가 새로운 사실주의 전통을 여는 '현대적 소설'의 대표자가 되었다고 극찬했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한동안 중요한 평론이라고는 리처드 훼이틀리가 1821년 1월 〈쿼털리 리뷰〉에 쓴 〈노생거 수도원〉과 〈설득〉에 대한 평론 1편뿐이었는데, 훼이틀리는 신학자·논리학자·정치경제학자로서 나중에 더블린 대주교가 되었다.

스콧과 훼이틀리의 평론은 제인 오스틴에 대한 진지한 비평의 기초가 되었다. 19세기 비평가들은 두 사람의 통찰력을 수용했으며, 현대 비평가들은 오스틴의 소설이 지닌 빈틈없는 짜임새에 매료되고,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제한된 사건과 배경을 가진 이야기를 통해 존재의 희비극을 드러낼 수 있게 한 기법상의 성취에 높은 평가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