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전

예루살렘 성전

다른 표기 언어 Temple of Jerusalem 동의어 거룩한 성전

요약 이스라엘 왕국 초기에는 계약궤가 여러 성소들, 특히 세겜과 실로 성소로 주기적으로 옮겨다니다가,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그 도시로 옮겨졌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주요 종교상징물인 계약궤는 왕권과 연결되었으며, 수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연합을 보여주는 중심적인 상징이 되었다. 다윗은 장차 성전을 세울 장소를 모리아 산, 즉 '성전 산'으로 정했는데, 이 산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 추측된다. BC 957년 솔로몬 왕이 완공한 제1성전은 계약궤를 안치하고 백성 전체가 모이는 장소로 건축했는데 그 안에는 계약궤를 안치해둔 지성소가 있다. BC 20년 헤로데 왕이 지은 제2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
예루살렘 성전

이스라엘 왕국 초기에는 계약궤가 여러 성소(聖所)들, 특히 세겜과 실로 성소로 주기적으로 옮겨다니다가,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그 도시로 옮겨졌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주요 종교상징물인 계약궤는 왕권과 연결되었으며, 수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연합을 보여주는 중심적인 상징이 되었다. 다윗은 장차 성전을 세울 장소를 모리아 산, 즉 '성전 산'으로 정했는데, 이 산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 추측된다.

제1성전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하여 BC 957년에 완공했다.

그러나 다른 성소들은 요시야 왕(BC 640경~609 재위)이 그 성소들을 철폐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유다 왕국의 유일한 제사 장소로 확정할 때까지 본래의 종교적인 기능을 그대로 수행했다. 제1성전은 계약궤를 안치하고 백성 전체가 모이는 장소로 건축했으며, 따라서 건물 자체는 크지 않지만 뜰은 넓었다. 이 성전 건물은 동쪽을 향했고, 장방형이었으며, 넓이가 똑같은 방 3개로 이루어졌다. 이 방에는 돌출 현관(⁾ulam),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본당(hekhal), 계약궤를 안치해둔 지성소(devir)가 있다.

성전은 정면(동편)을 뺀 3면이 창고(yaẒi⁽a)로 둘러싸여 있었다. 제1성전에는 제단이 5개 있었다. 하나는 지성소 앞에, 2개는 건물 안에, 대형 청동 제단은 현관 앞에, 층이 진 대형 제단은 뜰에 두었다. 뜰에 있는 거대한 청동 대야('바다'라고 일컬어졌음)는 사제들이 정결의식을 거행하는 데 쓰였다. 지성소 안에는 올리브 나무로 만든 두 '거룹'이 계약궤와 함께 서 있었다.

지성소는 '신의 임재'(Shekhina)가 일어나는 자리로 여겨졌고, 대사제가 욤 키푸르(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성전은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2세에게 수모를 당했는데, 그는 BC 604년과 BC 597년에 성전 보물들을 노략해갔고, BC 586년 '아브' 달 9일에는 건물을 파괴해버렸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성전이 파괴되고 BC 586년과 BC 582년에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예언의 성취로 보았으며, 이를 계기로 유다의 종교 신념들을 강화하고 유대인 독립국가를 다시 세우려는 희망을 일깨웠다.

페르시아 아카이메니아 왕조의 창시자이자 바빌로니아 정복자인 키루스(고레스) 2세는 BC 538년 칙령을 내려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다.

성전 재건 작업은 BC 515년에 끝났다. 원래의 건물을 검소한 형태로 건축한 제2성전의 자세한 도면은 알려지 않다. 성전 둘레에는 여러 개의 방과 문, 네모진 광장이 붙은 2개의 뜰이 있었다. 이 성전에는 제1성전에 딸려 있던 의식용 제구들이 없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계약궤 자체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예배의식만은 잘 조직된 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이 맡아 정교하게 집행했다.

페르시아·헬레니즘 시대(BC 4~3세기)에 이민족 군주들은 성전을 대체로 존중했으나, 일부는 도외시했다. 그런데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BC 168년 제단에서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스모니아가(家)의 반란을 촉발시켰으며,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유다 마카베오는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봉헌했다.

이 사건은 매년 하누카 절기(봉헌절) 때 기념된다. 로마정복 당시에 폼페이우스는 지성소에 들어갔으나(BC 63) 성전을 건드리지 않았으며, BC 54년 크라수스는 성전 보물을 약탈했다. 중요한 사건은 유대 왕이었던 헤로데 대왕(BC 37~4 재위)이 제2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한 일이었다. 재건 작업은 BC 20년에 시작하여 46년 동안 계속되었다. '성전 산' 지역을 2배로 넓히고, 대문들이 딸린 벽을 둘렀다.

그리고 그 안에 성전을 더욱 큰 규모로 세우고 외벽을 흰 돌로 입혔다. 새 성전 광장은 집회 장소 역할을 했고, 열주랑(列株廊) 밑에는 상인들과 환전상(煥錢商)들이 자리잡았다. 봉헌된 구역 가장자리에는 돌담(soreg)과 성벽(ḥel)을 쌓아 이방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성전 자체는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여인들의 뜰'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뜰은 사방에 문이 하나씩 있고, 각 모퉁이에는 방이 하나씩 딸려 있었다. 이 뜰의 이름은 여인들이 매년 수코트 축일을 지킬 때 올라서는, 사방이 빙 둘러져 있는 노대(露臺)에서 따왔다.

이 뜰에서 반원형 계단으로 아루어져 있는 서쪽 문을 지나면 '이스라엘인들의 뜰'이 나오는데, 이 뜰은 모든 유대인 남자들에게 개방된 '사제들의 뜰'의 일부였다. 성소 바깥을 둘러싼 '사제들의 뜰'에는 제단과 사제들의 정결의식을 위한 청동 대야가 있었다. 이 뜰의 가장자리는 문들과 방들로 담이 둘려 있었다. 성전 본당은 뒷면보다 앞면의 폭이 넓었다. 동쪽 정면에는 현관으로 통하는 문 양쪽에 기둥이 2개 서 있었다.

현관 안에는 다시 성소로 통하는 큰 문이 있었고, 성소 서쪽 끝은 지성소였다. 헤로데 성전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 민족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헤로데 성전은 종교의식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성서 및 그외 민족 문학 자료들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했고, 로마 시대에 유대인 최고법정이었던 산헤드린의 집회소이기도 했다. 66년에 시작된 로마에 대한 반란은 곧 성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로마군은 70년 아브 달 9~10일에 성전을 무너뜨림으로써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했다. 제2성전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부분은 오직 서쪽 벽(통곡의 벽)의 일부로서, 지금도 유대인들의 희망과 순례의 중심이 되고 있다.

691년 이슬람교도들이 세운 '바위 사원'과 '알아크사 모스크'(al-Aqṣā Mosque)를 둘러싼 벽의 일부가 된 이 벽은 1967년부터 다시 유대인들이 관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