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리

애틀리

다른 표기 언어 Clement (Richard) Att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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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3. 1. 3, 영국 런던 푸트니
사망 1967. 10. 8, 런던 웨스트민스터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복지국가 확립과, 영국을 영국연방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였던 인도 독립 승인을 주도했다.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애틀리는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변호사로 일했지만, 얼마 후 주로 사회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2년에 하원의원이 되었고, 최초의 노동당 내각에서 전쟁차관으로 일했으며, 2번째 노동당 내각에서는 랭커스터 공작령 상서와 체신장관을 잇따라 지냈다. 1931년에 애틀리는 조지 랜즈버리가 이끄는 노동당의 부당수가 되었다. 1935년 랜즈버리가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전쟁반대론으로 인해 당수 자리를 내놓게 되자, 애틀리가 그뒤를 이어 노동당 당수가 되었다. 1945년 5월에 그는 연립내각에서 노동당을 이끌었으며, 1945년 7월 선거에서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 참패하자 총리로 임명되었다. 애틀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독일 포츠담에서 마지막으로 회의를 열고 있을 때 총리직을 맡았다. 석탄과 강철, 철도, 민간 항공, 전신, 은행 등을 비롯한 영국의 주요산업을 국유화했고, 국민의료보험제도를 창설했으며, 그밖에도 경제학자 윌리엄 헨리 비버리지가 주장한 포괄적인 복지계획을 시행했다. 애틀리가 총리로 있는 동안, 인도가 영국연방의 테두리 안에서 독립을 승인받았는데, 그것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을 따로 수립하는 조치였고, 애틀리는 그 조치에 대해 큰 긍지를 가졌다.

영국의 복지국가 확립과, 영국을 영국연방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인도 독립 승인)를 주도했다.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애틀리는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변호사로 일했지만, 얼마 후 주로 사회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07~22년(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런던의 빈민가인 이스트엔드의 인보관에서 살았다. 그는 1907년에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했고, 1908년에는 독립노동당에 입당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스트엔드의 정치에 뛰어들어 1919년에 스테프니 자치구 구장이 되었고, 1922년에는 라임하우스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하원의원이 되었다. 애틀리는 최초의 노동당 내각(1924)에서 전쟁차관으로 일했고, 2번째 노동당 내각(1929~31)에서는 랭커스터 공작령 상서와 체신장관을 잇따라 지냈다.

1931년에 노동당의 램지 맥도널드 총리가 거국 연립내각을 구성하자 애틀리는 그와 결별했다. 같은 해 애틀리는 조지 랜즈버리가 이끄는 노동당의 부당수가 되었다. 1935년 랜즈버리가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전쟁반대론으로 인해 당수 자리를 내놓게 되자, 애틀리가 그뒤를 이어 노동당 당수가 되었다.

그는 1939년 9월 영국의 선전포고를 승인했지만, 네빌 체임벌린의 내각에 들어가는 것은 거부했다.

1940년 5월 그는 윈스턴 처칠 총리를 지지했고, 전쟁중에는 전시 내각에서 국새상서(1940~42)와 부총리(1942~45), 자치령 담당 국무장관(1942~43) 및 추밀원 의장(1943~45) 등을 지냈다. 1945년 5월에 그는 연립내각에서 노동당을 이끌었으며, 1945년 7월 선거에서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 참패하자 총리로 임명되었다. 애틀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독일 포츠담에서 마지막으로 회의를 열고 있을 때(1945. 7. 17~8. 2) 총리직을 맡았다.

영국은 미국이 주도한 유럽 부흥계획(1948, 마셜 플랜)을 받아들인 뒤, 상호방위를 위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1949)와 유럽 민족들의 통합을 위한 유럽 회의(1949)에 가입했다. 영국 국내에서는 애틀리 내각의 재무장관 겸 경제문제담당장관(1947~50)인 스태퍼드 크립스 경이 긴축정책을 엄격하게 시행하고 있었다.

석탄과 강철, 철도, 민간 항공, 전신, 은행 등을 비롯한 영국의 주요산업이 국유화되었다. 정부는 국민의료보험제도를 창설하고, 그밖에도 경제학자 윌리엄 헨리 비버리지가 주장한(1942) 포괄적인 복지계획을 시행했다(복지국가). 애틀리가 총리로 있는 동안, 인도가 영국연방의 테두리 안에서 독립을 승인받았는데, 그것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을 따로 수립하는 조치였고, 애틀리는 그 조치에 대해 큰 긍지를 가졌다.

영국은 또한 미얀마와 실론에도 독립을 부여하고,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했다. 팔레스타인에는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었다. 1951년 4월에 노동당 지도자인 어나이어린 베반과 해럴드 윌슨(나중에 영국 총리)이 의료보험 부담금 도입문제를 둘러싸고 각료직을 사임하자, 이미 허약해진 애틀리의 지위(하원에서 노동당과 야당의 의석 차이는 겨우 6석으로 줄어들어 있었음)는 더욱 약해졌다.

1951년 10월 선거에서 보수당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자 애틀리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는 1955년 12월에 당수 자리를 내놓으면서 백작작위를 받았다. 그의 저작으로는 〈노동당 회고 The Labour Party in Perspective〉(1937)와 회고록 〈그때 그당시 As It Happened〉(1954)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