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부일구

앙부일구

다른 표기 언어 仰釜日 동의어 양부일영, 해시계

요약 앙부일영이라고도 한다. 네 발 달린 반구형의 솥처럼 생겼기 때문에 앙부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종의 명으로 정초·정인지 등이 고전을 연구하고, 이천과 장영실이 공역을 감독하여 1434년에 만들었다고 하며, 이후 조선말까지 계속해서 만든 대표적인 해시계이다.
공중용 앙부일구는 2개를 만들어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교에 돌로 대를 쌓고 그 위에 설치하여 일반 백성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재료는 보통 청동이지만, 자기나 돌을 깎아 만든 것도 있다. 공중용 앙부일구는 30~40cm 정도의 크기이다.
휴대용 앙부일구로 유명한 것은 1874년에 강건이 납석으로 만든 것이 있다. 4~6cm 정도 크기의 직육면체 상자에 반구를 파고 그 안에 영침을 세웠다. 또한 방향을 쉽게 정할 수 있도록 자침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앙부일영이라고도 한다. 네 발 달린 반구형의 솥처럼 생겼기 때문에 앙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것은 〈원사 元史〉 천문지 앙의에 있는 곽수경법에 의해 만들었다고 하나 앙의와는 다르다.

앙부일구(보물 제845호)
앙부일구(보물 제845호)

우리나라에서는 세종 때 처음 만들었으며 이후 조선말까지 계속해서 만든 대표적인 해시계로 공중용으로 설치해놓는 것과 작게 만들어 휴대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한국과학사). 이 오목형 해시계는 일본에도 전해져 많은 유물이 남아 있으나 중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 상위고 의상에 의하면 세종의 명으로 정초·정인지 등이 고전을 연구하고, 이천(李蕆)과 장영실이 공역을 감독하여 1434년(세종 16)에 앙부일구를 비롯한 여러 천문의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김돈(金墩)의 앙부일구명에는 "무릇 시설 중에서 시간에 관한 것보다 더 중대한 것은 없다. 밤에는 경루가 있으나, 낮에는 시간을 알기 어렵다. 구리를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는데 모양이 솥과 같다. 지름에 둥근 송곳을 설치하여 북에서 남으로 마주 대하게 했으며, 움푹 팬 곳에서 휘어져 돌게 했고, 점을 깨알같이 찍었다. 그 속에 도(度)를 새겨서 반주천을 그렸다. 시신을 그린 것은 무식한 백성을 위한 것이며, 시간이 정확하고 해 그림자가 명백하다. 길가에 놓아두니 구경꾼이 모여든다. 이로부터 백성도 이것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고 앙부일구에 대해 적고 있다.

공중용 앙부일구는 2개를 만들어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교에 돌로 대를 쌓고 그 위에 설치하여 일반 백성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이때의 앙부일구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18세기 전후의 작품들이 현존하여 궁중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2기가 현재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앙부일구의 재료는 보통 청동이지만, 자기나 돌을 깎아 만든 것도 있다.

공중용 앙부일구는 보통 30~40cm 정도의 크기이다. 앙부일구는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 끝이 뾰족한 막대[影針]를 쓰는데 이것도 보통 청동으로 만든다. 영침의 길이는 앙부일구 지름의 절반이 된다. 영침의 끝을 앙부일구의 중심에 오도록 하며 그 방향은 천구의 북극을 향한다. 앙부일구의 안쪽면에는 절후선이라는 13개의 위선이 있고, 시각선이라는 여러 개의 경선이 그어져 있다. 시각선과 절후선은 항상 서로 직교한다. 절후선의 가운데 있는 춘추분선은 천의 적도면과 일치하는 대원이 되며 나머지 12개의 절후선은 적도에 평행하다. 태양의 고도가 여름에는 높아지고 겨울에는 낮아지므로 절후선에 닿는 그림자의 위치로 시간뿐만 아니라 그해의 절기를 알 수 있다. 청동으로 만든 앙부일구에서는 절후선이나 시간을 나타내는 글씨를 칼로 홈을 파고 은으로 상감했다. 앙부일구의 영침의 위치는 관측 지점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대개는 윗면이나 옆면에 한양북극고도 또는 북극출지의 도수로서 표시하고 있다.

휴대용 앙부일구로 유명한 것은 1874년(고종 8)에 강건(姜健)이 납석으로 만든 것이 있다. 4~6cm 정도 크기의 직육면체 상자에 반구를 파고 그 안에 영침을 세웠다. 또한 방향을 쉽게 정할 수 있도록 자침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밖에 청동제나 상아로 만든 앙부일구가 상당수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