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르바니팔

아슈르바니팔

다른 표기 언어 Ashurbanipal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아시리아

요약 고대 중동지역에서 체계를 갖춘 도서관을 니네베에 최초로 설립했다. 아슈르바니팔이 일찍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른 것은 커다란 영향력을 가졌던 어머니 나키아 자쿠투 여왕 때문인 듯하다. 그는 통치에 전념했고 북부 고산부족을 능란하게 다루었다. 이전의 메소포타미아 왕 중에서는 드물게 그는 모든 필사체를 판독하고 사제들의 지식에 능통하여 수메르 및 난해한 아카드 문자와 언어를 이해했다. 아슈르바니팔의 위대한 업적은 그의 학문적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고대 중동에서 최초로 장서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목록을 만든 도서관을 니네베에 세웠다. 그곳에 있던 약 2만 720개의 아시리아 점토판과 그 파편들이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왕의 명령으로 필사자들이 사원의 장서들에서 모든 장르의 문서들을 조사·수집하여 사본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인간과 동물, 식물의 동태와 모습, 해와 달, 별의 움직임 등의 관찰을 기초로 한 점복에 관한 사본들이 많은 양을 차지한다. 필사교육에 필수적인 수메르·아카드 및 기타 언어를 사전형식으로 편찬한 서적도 있다. 장서는 아슈르바니팔 개인의 넒은 지적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다양했으며, 많은 책의 간기에는 왕실 인장이 찍혀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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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아슈르바니팔의 통치
  4. 성격과 평가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개요

고대 중동지역에서 체계를 갖춘 도서관을 니네베에 최초로 설립했다(메소포타미아).

초기생애

통치 초기에 페르시아 만에서 실리시아·시리아·이집트에 이르는 판도를 가진 제국의 정력적인 군주였던 아슈르바니팔의 생애는 그의 자전적 연대기와 왕실 서간을 통해 대체로 밝혀져 있다.

아버지 에사르하돈은 BC 672년 5월 왕실 내분을 피하기 위해 그를 아시리아의 황태자로 지명하고 같은 서열의 이복형 샤마시 슘 우킨은 바빌로니아의 황태자로 지명했다. 아슈르바니팔이 일찍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른 것은 커다란 영향력을 가졌던 어머니 나키아 자쿠투 여왕 때문인 듯하다.

그는 통치에 전념했고 북부 고산부족을 능란하게 다루었다. 그의 스승인 나부 샤르 우수르는 장군이었으며, 또 나부 아히 에리바는 그가 역사와 문학에 흥미를 갖게 해주었다. 이전의 메소포타미아 왕 중에서는 드물게 그는 모든 필사체를 판독하고 사제들의 지식에 능통하여 수메르 및 난해한 아카드 문자와 언어를 이해했다. 그의 강건한 힘은 사냥과 궁술, 승마에서 나타났다. 실제 전쟁경험에 대해서는 증거가 거의 없지만, 자신의 용맹과 지략 때문에 아버지가 총애했다고 한 아슈르바니팔의 주장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그는 곧이어 왕실과 귀족들을 거느리는 막중한 책무를 떠맡았다. 모든 행정관과 장관은 그와 상의를 거친 뒤 임명되었고, 많은 국가적 건설계획을 책임졌다.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보고 편지에서 나타나듯이 그의 정치적 자질은 에사르하돈이 이집트 원정을 떠나면서 모든 국정을 그에게 일임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BC 669년 12월 에사르하돈이 하란에서 죽자 그는 아무런 문제 없이 전권을 장악했다. 여왕인 어머니는 왕실과 조정 신하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아슈르바니팔의 통치

아슈르바니팔의 첫번째 관심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왕 타하르카(타르쿠라고도 하며, 〈구약성서〉에서는 티르하가)는 나일 강 삼각주에 침입하여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아시리아의 신속한 군사행동으로 타하르카는 쫓겨났다. 아슈르바니팔은 토착 제후들에게 아시리아 주둔군의 지원을 받게 했다. 제후들 중 몇 명은 타하르카와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아시리아군은 그들을 니네베로 추방했다. 토착인 통치자를 두고자 했던 자신의 계획에 따라 그는 삼각주의 최고통치자로 네코 1세를 선택하고 그와 협정을 맺었다.

네코 1세(Necho I)
네코 1세(Necho I)

타하르카의 후계자 타누타몬(탄다마네)이 압력을 가중시키자 BC 664~663년에 또다시 아시리아의 간섭이 시작되었다. 이때 아시리아군은 멤피스를 장악하고 테베를 약탈했다. BC 663년 네코가 죽은 뒤에도 아슈르바니팔은 자신의 정책을 고수하여 또다시 이집트의 왕으로서 다른 토착 제후인 프삼티크(프삼메티코스 1세)의 즉위를 인정했다. 이러한 조치로 평화를 확보한 그는 다른 곳에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BC 654년 아시리아 주둔군은 이집트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무역은 계속되어 이러한 손실이 그의 지위를 전혀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그는 페니키아의 티레 시로 방향을 돌렸다. 당시 티레는 이집트와 리디아의 독립노력을 지원했다. 티레가 정복되자 시리아와 실리시아의 왕들이 다시 항복해왔고 리디아기게스킴메리족의 침입에 아시리아의 원군을 요청했다.

리디아의 용병이 이집트를 도운 적이 있기 때문에 이 요청은 거부당했다. 만네아족에 대한 신속한 군사력의 과시와 스키타이 족장 마디에스와의 동맹을 통해 킴메리족의 진출을 격퇴했다. 이로써 그는 남쪽에 접경한 바빌로니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아슈르바니팔은 이복형인 샤마시 슘 우킨을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승인했지만 제한된 권력만을 주었다. 그곳의 아시리아 주둔군과 관리들은 계속해서 아시리아 왕에게 보고했고, 아슈르바니팔은 해안 지방(페르시아 만)과 우르 지방의 총독을 계속 임명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그에게 직접 청원하여 토지를 하사받았다.

16년 동안 이복형과의 관계는 순탄했다. 엘람 지방의 반란자 텝트 훔반이 아시리아의 영토에 들어와서 살해되었을 때 아시리아는 먼저 엘람의 제후들인 훔바니가시와 탐마리투를 지원했다. 즉 이들에게 엘람의 특별한 지역을 주어서 다스리게 했으며 아시리아를 직접 통치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슈르바니팔의 이런 조치에는 또한 그의 형을 도울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복형을 그때까지 신뢰하고 있었다. 이때쯤 그는 바빌로니아 사절단을 접견했다.

그리고 엘람 문제에 공모했다는 이유로 감불루족을 징벌했다.

바빌론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된 샤마시 슘 우킨은 점차 이 지방의 전통적인 민족주의와 저항정신에 물들어갔다. 그는 아마도 아슈르바니팔의 유화정책을 허약함이나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기회로 해석한 듯하다. 어쨌든 그는 아시리아 제국의 여타 변경 민족들인 페니키아인·유다인·엘람인·이집트인·리디아인 그리고 아랍 및 칼데아 부족 등과 연합을 모색했다.

이들 민족이 동시에 일어났다면 아시리아는 무너졌을 것이다. 음모를 발견한 아슈르바니팔은 곧장 바빌로니아인에게 호소했고 특별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이것이 거절당하자마자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이복형에게 직접적인 위험이 미치지 않는 방도들을 찾았던 것 같다. 전쟁도 직접공격보다는 포위전쟁의 형태를 취했다. 바빌로니아의 연대기에는 3년 동안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끊임없이 충돌이 일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부 분쟁에 시달리고 있던 엘람은 반란을 원조할 수 없었다. 기아 때문에 버려진 바빌론으로 퇴각한 아랍인들은 굶주림으로 인해 더욱 맹렬해졌다. 샤마시 슘 우킨은 BC 648년 불타는 자신의 성 안에서 자살했다. 이 도시에 대한 아슈르바니팔의 심정은 도시의 복구명령을 내리고 칼데아 귀족 칸달라누를 이곳의 부왕(副王)으로 임명한 것에서 살필 수 있다.

아슈르바니팔은 반란진압 조치를 강화해야 했다.

아랍 부족을 습격하면서 나바테아족의 우아테와 그 동맹세력을 격파하고 카다르족을 고립시켰다. 엘람과의 싸움은 더 힘들었다. 전쟁은 아시리아가 수사를 약탈한 BC 639년까지 질질 끌었다. 이해에 그는 승리의 기념식을 가졌다. '모든 세계'를 그의 지배 아래 두었고 포로가 된 4명의 왕이 기념행진에서 그의 전차를 끌었다.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계속적인 군사 움직임 속에서도 그는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썩히지 않았다. 리디아와 메디아의 확장에 따른 북부와 동부 무역로의 폐쇄 위기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경제는 번창했다.

BC 631년 이후의 그의 치세를 알려주는 자료는 너무 부족한 형편이며, 아슈르바니팔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선례를 좇아 두 아들인 아슈르 에텔 일라니와 신 샤르 이슈쿤을 정확한 권력배분 속에서 공동섭정하도록 한 것 같다. 그가 죽은 뒤 20년이 못 되어 제국이 멸망한 것은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내부 분쟁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민족의 침입에 의한 것이었다.

성격과 평가

아슈르바니팔은 종교적인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주요사원을 거의 개축하거나 장식했다. '계승의 회당(會堂)'과 니네베의 이슈타르 사원에 대한 관심은 특히 유달랐다. 그는 많은 일을 점복(占卜)에 따라 행했다. 점을 통해 그는 개인적으로 또 정보에 관해 흥미를 느꼈다. 그는 신년축제를 거행했는데, 왕비 아슈르 샤라트와 함께 정원에서 식사하는 그의 모습을 담은 부조(浮彫)는 바로 이 축제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의 동생들은 하란과 아슈르의 승려였다.

아슈르바니팔의 위대한 업적은 그의 학문적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고대 중동에서 최초로 장서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목록을 만든 도서관을 니네베에 세웠다(아슈르바니팔 도서관). 그곳에 있던 약 2만 720개의 아시리아 점토판과 그 파편들이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왕의 명령으로 필사자(筆寫者)들이 사원의 장서들에서 모든 장르의 문서들을 조사·수집하여 사본을 만들었다.

이것은 아슈르·칼라·니네베에서 골라낸 기본수집 점토판에 추가되었다. 여기에는 인간과 동물, 식물의 동태와 모습, 해와 달, 별의 움직임 등의 관찰을 기초로 한 점복에 관한 사본들이 많은 양을 차지한다. 필사교육에 필수적인 수메르·아카드 및 기타 언어를 사전형식으로 편찬한 서적도 있다. 그는 또한 많은 주문·기도문·의식서·우화·속담 그리고 여러 가지 '정전'(正典), '비정전'의 사본들을 수집했다.

천지창조·길가메시·이라·에타나·안주 등과 같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전통적 서사시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에 보관되었기 때문이다(메소포타미아 문학). 안내서와 과학서, 몇 가지 민담(〈니푸르의 가난한 사람 The Poor Man of Nippur〉은 바그다드의 민담 〈천일야화 Thousand and One Nights〉의 선구 형태임)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도서관(비록 그 가운데 극히 일부분의 점토판만이 남아 있음)이 단순히 점쟁이나 왕의 정신 건강을 책임진 자들이 참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서관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서는 아슈르바니팔 개인의 넒은 지적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다양했으며, 많은 책의 간기에는 왕실 인장이 찍혀 있다.

아슈르바니팔은 예술의 후원자였다. 니네베에 궁전을 신축하고 개축했으며, 여기에 자신의 오랜 치세 기간에 있었던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기념적인 사건들을 조각으로 새겨 장식했다. 이러한 양식은 선대(先代)의 그것보다 놀라운 발전을 보이고 있으며, 많은 부조들이 고대 세계에서는 비견할 바 없는 서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의 활동적이고 정력적인 성격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