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미니우스

아르미니우스

다른 표기 언어 Jacobus Armin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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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60. 10. 10, 네덜란드 오우데와테르
사망 1609. 10. 19, 레이덴
국적 네덜란드

요약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 신학자.
(네). Jacob Harmensen/Hermansz.

엄격한 칼뱅주의 예정론을 반대했고, 후대에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알려진 자신의 신앙체계를 발전시켰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죽자, 테오도르 아이밀리우스라는 사람이 어린 아르미니우스를 양자로 삼고 위트레흐트에 있는 학교에 보내 공부시켰다. 그뒤 1575년 양아버지인 아이밀리우스가 죽고, 오우더와터르 출신인 마르부르크대학교 교수 루돌프 스넬리우스(스넬 반 로이옌:1546~1613)가 그를 레이덴대학교(1576~82)·바젤대학교·제네바대학교(1582~86) 등에서 공부하도록 뒷받침했다.

로마에 있는 파도바대학교와 제네바에서 잠시 머무른 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1588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1603년에는 레이덴대학교 신학교수로 초빙받아, 그뒤 죽을 때까지 그 학교에서 가르쳤다.

교수생활의 마지막 6년 동안 신학 논쟁에 휩싸였고, 특히 레이덴대학교의 동료 교수인 프란키스쿠스 고마루스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온건한 기질을 지닌 아르미니우스는 논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도 구원을 받도록 선택된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 이전에 이미 선택되었다고 주장한 칼뱅주의 예정론을 믿었지만, 점차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에게 예정론은 매우 귀에 거슬리는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예정론은 구원을 얻는 데 인간의 결단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르미니우스는 조건적 선택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그가 선물로 주는 구원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했다.

그가 죽은 이듬해인 1610년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위트레흐트 출신의 목사인 요한네스 위텐보게르트가 쓴 신학적 단언서인 〈항변 Remonstrance〉에 서명하여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을 지지했다. 항변파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고마루스를 지지하는 대표자들로 구성된 1618~19년의 네덜란드 개혁교회 총회인 도르트(도르트레흐트) 교회회의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 결과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 회의에서 불신과 정죄를 받았고, 아르미니우스파 참석자들은 쫓겨났으며, 그외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1629년에는 아르미니우스의 저술들(〈Opera theologica〉)이 처음으로 레이덴에서 출판되었고, 1630년 항변파 형제단이 신앙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받았으며, 마침내 1795년에는 네덜란드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