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토 5세

식스토 5세

다른 표기 언어 Sixtus V
요약 테이블
출생 1520. 12. 13, 교황령 안코나 그로탐마레
사망 1590. 8. 27,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교황(1585~90 재위).
본명은 Felice Peretti.

교황청을 개혁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 교황청). 1533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1547년 피렌체 공국의 시에나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2번에 걸쳐(1557~60) 베네치아의 종교재판소장을 역임했으며, 지나친 엄격함으로 인해 소환을 당했다. 1566년 교황 비오 5세는 그를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총대리와 주교로 임명했으며, 1570년 5월 17일에는 추기경으로 승격시켰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재임(1572~85)중에 은퇴해 1580년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의 저술들을 편집했다. 1585년 4월 24일 그는 교황령을 대혼란 속에 빠뜨린 교황 그레고리오의 후계자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교황청은 반종교개혁에 관련된 여러 가지 요구들을 충족시키려다 재정적으로 고갈되어 있었고, 세상에는 도적떼가 횡행하는 등 무법천지였다.

식스토는 신속히 평화와 안정을 회복시켰으나, 도적들에게 취한 극단적인 조처로 많은 적들이 생겼다. 그는 교회의 예비자산을 보강하기 위한 재정정책으로 공직의 매매, 새로운 공채(monti)와 세금의 신설, 정찰가격제 등을 시행했다. 그는 성베드로 대성당 원형 돔의 완성, 라테라노 궁전과 바티칸 궁전의 재건, 도시계획의 수정, 로마를 중세도시의 모습에서 바로크풍의 도시로 전환시키려는 총체적인 장식사업 등 여러 가지 거대한 건축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소비했다. 그러나 그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통치를 마감할 수 있었다.

식스토의 위대함은 교회의 중앙행정을 개혁했다는 데 있다. 1586년 교서를 내려 추기경단의 규모를 70명으로 제한했고, 교황청의 비서실을 재구성했으며, 1588년 1월에는 교황청의 전반적인 행정체계를 정비했다. 또한 15개의 성성을 설립했고 그 형태와 기능을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이 제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다시 개혁될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그는 반종교개혁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는 그가 설립한 새 교황청 기구를 통해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법령들이 효율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식스토 5세는 국제관계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특히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가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위그노파와 가톨릭교도들 사이의 복잡한 종교내전(1562~98)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1585년 8차 종교전쟁 때 식스토는 나바르의 프로테스탄트파 군주 앙리(프랑스 왕 앙리 4세)를 파문했으며, 스페인이 영국을 침공하는 데 필요한 보조금을 지불할 것을 약속했다(→ 3앙리 전투). 그러나 앙리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고려하기 시작하자 식스토는 앙리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프랑스의 왕권을 놓고 앙리와 협상하던 도중 죽었다.

1913년 U. 발자니의 〈식스토 5세 Sisto Quinto〉, 1935년 L. M. 페르손네의 〈식스토 5세:권력의 천재 Sisto Ⅴ:Il genio della potenza〉가 각각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