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파

시파

다른 표기 언어 時派

요약 조선후기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세력으로 벽파와 대립했다.
정쟁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왕위계승마저 위협받은 정조는 왕권이 노론 척신당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을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즉위 후 준론 세력을 중심으로 탕평을 실시하여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노론·소론 및 남인의 청류를 등용했다. 비노론계가 중앙정계에 많이 진출하게 되면서 노론은 자신들의 정치적 우위를 확실히 관철시키고자 하여 벽파를 형성했다. 이와는 반대로 노론 중에서도 다른 당파의 정계 진출도 무방하다는 생각에서 왕의 정책을 지지하는 일파가 있었다. 이들은 노론의 우위를 방기하고 왕에 아부하는 등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는 뜻에서 시파로 불렸다. 여기에 노론 외에 소론·남인도 많이 참여했는데, 정조 사후 시파는 벽파의 공세로 도태되었다.

벽파(僻派)와 대립하고 있었다.

영조는 붕당간의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완론탕평(緩論蕩平)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론계 대신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삼았다. 이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형제인 김귀주(金龜柱)를 중심으로 결집한 일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남당(南黨)으로 불리는 척신당을 형성했다. 이에 반해 죽은 사도세자의 장인으로서 세손(뒤의 정조)을 보필했던 홍봉한(洪鳳漢) 일파가 북당(北黨)을 형성하여 남당과 대립하며 또다른 척신당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양당은 1762년(영조 38)에 죽은 사도세자에 대해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정치관이 부왕과는 차이가 있었으며 집권 노론 척신당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론은 사도세자가 국왕으로서의 자질에 큰 하자가 있어서 영조가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이며 당시 노론 대신의 처신도 큰 잘못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런 반면 일부 비판적인 노론들과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은 사도세자를 통하여 정치적 재기를 기대했었던 만큼, 사도세자에게 개인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죽일 만한 죄는 되지 않았는데 정권을 장악했던 노론의 집권 주류가 영조와의 사이를 모함하여 죽게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정파의 분립으로 구체화된 것은 정조대에 이르러서였다.

정조(正祖)
정조(正祖)

정쟁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왕위계승마저 위협받은 바 있는 정조는 왕권이 노론 척신당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을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즉위 후 왕권 확립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정조는 의리와 명절을 강조하는 준론(峻論) 세력을 중심으로 탕평을 실시하여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노론·소론 및 남인의 청류(淸流)를 등용했다. 또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통하여 인재를 양성했는데 이때 윤행임(尹行恁)·김조순(金祖淳) 등이 발탁되어 정조의 친위학자군을 이루었다.

1788년(정조 12) 남인 채제공(蔡濟恭)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비노론계가 중앙정계에 많이 진출하면서 1792년에는 영남 남인들이 사도세자사건의 명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때 노론 집권층은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따라 입지가 축소되고 있었는데다가 사도세자 문제의 재론으로 정치적 정통성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강경파를 중심으로 사도세자사건과 관련된 종전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노론의 정치적 우위를 확실히 관철시키고자 하여 벽파를 형성했다. 여기에는 일부 다른 당파의 인물도 참여했지만 주류는 역시 노론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노론 중에서도 그들의 우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는 다른 당파의 정계 진출도 무방하다는 생각에서 왕의 정책을 지지하는 일파가 있었다. 이들은 노론의 우위를 방기(放棄)하고 왕에 아부하는 등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는 뜻에서 시파로 불렸다.

그런데 여기에는 노론 외에 소론·남인도 많이 참여했는데, 이후 시파에 속했던 소론과 남인 대부분은 벽파의 공세로 도태되었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벽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서 시파는 탄압을 받았다. 1802년(순조 2) 김조순이 딸을 왕비로 책립하여 국구(國舅)의 위치에 올라 정국의 주도권을 서서히 잡아가고 있었는데, 그는 정조 때 발탁되어 왕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시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김조순
김조순

1804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자,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김조순은 자신의 일족이면서도 벽파였던 김달순(金達淳)을 사사하고 김관주를 유배시키는 등 다수의 벽파를 축출했다. 시파는 마침내 1807년 이경신(李敬臣)의 옥사를 계기로 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시파와 벽파의 분쟁은 끝이 나고 김조순의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벽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