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파

벽파

다른 표기 언어 僻派

요약 정조 즉위 후 외척을 배제하고 노론, 소론 및 남인의 청류를 등용한 후 1792년 남인들이 사도세자 문제를 재론하였다. 집권 노론 층은 기왕의 입장을 확인하면서 노론의 정치적 우위를 관철시키고자 했는데, 이를 벽파라 한다.
벽파와는 반대로 타 당파의 정계 진출도 허용하면서 왕의 정책을 지지하던 일부 노론세력을 시파로 부른다.
벽파는 정조대에는 불리한 위치였지만,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804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으면서 시파의 반격으로 다수의 벽파가 축출되었고 1807년 완전히 패배하여 시파가 실권을 잡았다.

여기에 대립한 파가 시파(時派)이다.

영조는 붕당간의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완론탕평(緩論蕩平)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지지하는 노론계 대신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신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 김씨)의 형제인 김귀주(金龜柱)를 중심으로 결집한 이들은 남당(南黨)으로 불린 척신당을 형성했다. 한편 죽은 사도세자의 장인으로서 세손(뒤의 정조)의 보필을 맡게 된 홍봉한(洪鳳漢) 일파는 북당(北黨)으로, 남당과 대립하며 또다른 척신당을 이루었다. 당시의 양당은 1762년(영조 38)의 사도세자사건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가 정치관에 있어 영조와는 차이가 있었으며 집권 노론 척신당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던 만큼 대부분의 노론은 국왕으로서의 자질에 큰 하자가 있는 사도세자를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이었으므로 당시 노론 대신의 처신도 큰 잘못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한 반면 일부 비판적인 노론 및 소론과 남인은 사도세자가 개인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죽일 만한 죄는 되지 않았는데 정국의 전권을 장악했던 노론의 집권 주류가 모함하여 죽게 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정파의 분립으로 구체화된 것은 정조대에 이르러서였다.

정조는 즉위 후 왕권확립을 위해 의리와 명절을 강조하는 준론(峻論) 세력을 중심으로 탕평을 실시하여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노론, 소론 및 남인의 청류(淸流)를 등용했다. 아울러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이들을 자신의 친위학자군으로 삼았다. 1788년(정조 12)에는 남인 채제공(蔡濟恭)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비노론계가 중앙 정계에 많이 진출하게 되고, 1792년(정조 16)에는 영남 남인들이 사도세자사건의 명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노론 집권층은 왕권강화정책에 의해 입지가 축소되고 있었는데다가 사도세자 문제가 재론됨으로써 정치적 정통성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자 강경파를 중심으로 사도세자사건과 관련된 기왕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노론의 정치적 우위를 확실히 관철시키고자 했는데, 이들이 벽파를 형성했다. 벽파의 주류는 역시 노론이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심환지(沈煥之)였다. 그는 신임의리(辛壬義理)의 고수를 표방하고 이에 위배되는 남인 계열의 채제공·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의 성토에 앞장섰으며, 소론계의 서명선(徐命善)도 공격하여 벽파의 선봉으로 인정되었고 이후 일파의 영수가 되었다.

 심환지(沈煥之)
심환지(沈煥之)

여기에는 일부 타(他)당파의 인물도 참여했지만 이들의 참여는 개인적 차원의 것이었을 뿐 소속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벽파와는 반대로 우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는 타 당파의 정계 진출도 무방하다는 생각에서 왕의 정책을 지지하는 일부의 노론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노론의 우위를 방기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고 하여 벽파에 의해 시파로 불렸다.

벽파는 정조대의 정국구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삼고 자파의 김관주(金觀柱) 등을 조정에 진출시키는 한편, 벽파의 정국운영에 장애가 되는 시파세력을 비롯한 노론계 인물들을 의리에 배치되고 사도세자 추숭(追崇)을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대거 정계에서 축출했다. 또한 1801년에 시작된 천주교 탄압을 이용하여 남인 세력을 제거했으며 정조가 설정한 왕권 중심 군사적 구도의 핵심이며 시파세력인 김조순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했다.

그러나 1804년(순조 4)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으면서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은 김조순이 주도하는 시파의 반격을 받았다. 김달순(金達淳)이 사사당하고 김관주가 유배되는 등 다수의 벽파가 축출되었으며, 마침내 1807년 이경신(李敬臣)의 옥사를 계기로 벽파는 완전히 패배하고 김조순의 안동김씨가 실권을 잡았다. 이로부터 왕권이 유약해지면서 왕권문제를 초점으로 하여 발생한 정쟁이라고 할 수 있는 시파·벽파의 분파는 끝났고, 이후 정국은 극소수의 노론 중 이름있는 외척가문 중심으로 전권이 장악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시파, 탕평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