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릿

스몰릿

다른 표기 언어 Tobias (George) Smol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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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21. 3. 19, 스코틀랜드 덤버턴셔 카드로스에서 세례받음
사망 1771. 9. 17, 이탈리아 토스카나 리보르노 근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풍자소설가.

악한소설 〈로더릭 랜덤의 모험 The Adventures of Roderick Random〉(1748)과 〈페러그린 피클의 모험 The Adventures of Peregrine Pickle〉(1751), 서간체 소설 〈험프리 클링커의 원정 The Expedition of Humphry Clinker〉(1771)이 가장 유명하다.

변호사와 군인 가문 출신으로 정치적으로는 휘그당원이고 종교적으로는 장로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727(또는 1728)년 덤바턴 그래머 스쿨에 입학했고, 글래스고대학교에 진학했으며, 글래스고에서 의사 윌리엄 스털링과 존 고든 밑에서 의술을 배웠다. 그의 첫번째 전기작가는 그가 해부학과 의학 수업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첫 소설 〈로더릭 랜덤〉에는 그가 그리스어·수학·도덕철학·자연철학·논리학·문학을 공부했다는 흔적이 보인다. 학위를 받지 않고 1739년 대학을 그만두고 쓴 희곡 〈국왕 살해 The Regicide〉를 가지고 런던으로 갔다.

1년 뒤에 영국 해군 군의관의 2등 조수로 임명되었으며, 'HMS 치체스터호'에 배치되어 1741년 1월 10일에 자메이카의 포트로열에 닿았다. 이때 스몰릿은 카르타헤나(지금의 콜롬비아)에 대한 해군의 폭격전투를 목격한 것 같다. 자메이카에서 상속녀 앤 라셀을 만나 약혼했고, 그곳에서 결혼까지 한 듯하다. 런던으로 혼자 돌아와 웨스트민스터 다우닝가에 병원을 열었고, 1747년 아내가 왔다.

〈국왕 살해〉로 좋은 성과를 얻지는 못했으나, 1746년 킬로든에서 제임스 2세 지지파의 반란이 진압된 뒤 그의 시중에서 가장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눈물 The Tears of Scotland〉을 썼다. 이무렵 소송을 걸기도 했지만 토지와 노예에 투자했던 아내의 상당액의 지참금 중 일부만을 겨우 찾을 수 있어서 더 싼 메이퍼의 채플가로 이사했다. 채플가에 살 때, 로마의 시인 주베날리스풍의 풍자시 〈충고 Advice〉와 〈책망 Reproof〉을 썼다.

1748년 당시 영국 해군생활을 사실적으로 이야기한 소설 〈로더릭 랜덤의 모험〉을 출판했으며, 프랑스의 작가 알랭 르네 르사주의 악한소설 〈질 블라스 Gil Blas〉를 번역했다.

1750년 애버딘에 있는 마리스컬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페러그린 피클의 모험〉에 필요한 자료를 찾으려고 파리에서 지냈다. 이 작품에는 퇴임한 해군장교 하우저 트러니언이라는 매우 희극적인 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땅 위에 살면서도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제국군함의 갑판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1752년 영국의 유명한 휴양지인 바스의 수질을 의학적인 측면에서 비판한 〈물의 외용(外用)에 대하여 An Essay on the External Use of Water〉를 출판했다.

이 글로 많은 적이 생겼고 수입이 줄었다. 관대한 탓에 3류문인인 피터 고든이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가 그가 편법을 써서 빚을 갚지 않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졌다. 스몰릿은 고든과 그의 집주인을 때리러 갔다가 주거 침입과 폭행미수라는 죄목으로 각각 1,000파운드와 500파운드를 지불하도록 고소당했고, 결국 약간의 손해배상금을 냈다. 그뒤 첼시의 먼머스하우스에 살면서, 작가 새뮤얼 존슨과 올리버 골드스미스 같은 대표적인 문학가와 배우 데이비드 개릭, 유명한 의사이자 해부학자 존 헌트 등을 친구로 사귀면서 이들의 방문을 받았다.

〈페러그린 피클의 모험〉에 나오는 한 대목을 자전적으로 해석해 보면, 그는 일요일마다 불행한 문인 동료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 주었고 맥주·푸딩·감자·포도주·펀치와 캘버트의 맥주로 그들을 대접했다고 한다. 그는 화를 잘 내고 싸우기 좋아하며, 매우 정력적이고 담대하면서 관대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어떤 애텀이란 자의 생애와 모험 The History and Adventures of an Atom〉과 함께 오늘날 그의 소설 중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패섬 백작 페르디난드의 모험 The Adventures of Ferdinand, Count Fathom〉은 1753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이 거의 팔리지 않아서 친구들로부터 돈을 빌려야만 했고 잡문을 쓸 수밖에 없었다. 1753년 6월, 15년 만에 처음으로 스코틀랜드에 갔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장난기 있는 미소 때문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런던에 돌아와서 스페인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Don Quixote〉를 번역하기 시작했고, 1755년에 출판했다. 1756년초에 토리당의 교회지인 〈크리티컬 리뷰 The Critical Review〉의 편집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영국사 Complete History of England〉를 써서 많은 돈을 벌었다.

1년 뒤에 소극(笑劇) 〈보복 The Reprisal : or, The Tars of Old England〉을 드루어리레인 극장에서 공연하여 약 200파운드를 벌었다. 1758년에는 58권으로 편찬된 〈세계 역사 Universal History〉의 총편집일을 맡게 되었고 직접 프랑스와 이탈리아 및 독일의 역사를 썼다. 정치가 존 윌크스와 친분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존슨의 흑인 하인 프랜시스 바버를 강제 징병에서 빼낼 수 있었다.

〈크리티컬 리뷰〉에 실린 기사로 인해 찰스 노리스 장군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100파운드의 벌금을 냈으며 킹스 벤치프리슨 감옥에 3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편하게 지낸 듯하며 이 경험을 토대로 소설 〈랜슬롯 그리브스 경의 모험 The Adventures of Sir Launcelot Greaves〉(1762)을 써서 〈브리티시 매거진 The British Magazine〉에 연속물로 실었다.

1760년에 이 잡지의 편집인이 되었다.

2년 뒤에, 뷰트 백작 3세이며 총리인 존 스튜어트를 지지하기 위해 창간된 주간지 〈브리턴 The Briton〉의 편집인이 되었다. 한편 〈모든 국가의 현재 상태 The Present State of all Nations〉라는 제목의 8권으로 된 책을 쓰고 있었고, 프랑스의 작가 볼테르의 다양한 작품을 36권 분량으로 번역하고 있었다.

이무렵 스몰릿은 심한 병에 걸렸고, 포르투갈에 있는 군대의 의사직과 마르세유와 마드리드에 있는 영국 영사 자리를 얻으려다가 실패했다. 1763년 15세 된 외동딸 엘리자베스가 죽어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그는 〈크리티컬 리뷰〉와 다른 모든 문학지에서 손을 떼고 아내와 함께 프랑스로 가서 니스에 정착했다.

1766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 Travels Through France and Italy〉을 출판했다.

이 책은 그의 유일한 논픽션으로 지금도 읽히고 있다. 1766년에 잉글랜드로 돌아와 스코틀랜드를 방문했으며 크리스마스에 다시 잉글랜드의 바스로 돌아갔다. 바스에서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통하는 〈험프리 클링커의 원정〉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서간체 소설로서 영국을 일주한 한 가족의 모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몸이 점차 쇠약해져서 1768년 이탈리아의 피사로 요양을 떠났다. 1770년 가을에 〈험프리 클링커의 원정〉의 대부분을 써서 1771년 6월 15일에 출판했다.

그는 선배격인 당대의 작가 새뮤얼 리처드슨이나 헨리 필딩과 대등한 수준은 아니지만, 활력이 넘치는 희극을 빨리 쓴 점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희극적인 인물을 외모를 통해 묘사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제임스 1세 때의 극작가 벤 존슨을 상기시켜주며 뒷날 찰스 디킨스가 나올 길을 열었다. 현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풍자소설가로서의 예술성은 떨어지나, 흩어져 있는 에피소드들을 악한인 주인공의 삶 속에 연결시키는 악한소설에 뛰어났다. 필딩 다음으로 당대의 삶을 파노라마식으로 펼쳐 보이는 데 탁월했으며, 영국 해군의 상황을 그린 부분은 특별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