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레스비히홀슈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다른 표기 언어 Schleswig-Holstein
요약 테이블
위치 독일 북서부
인구 2,953,270명 (2024년 추계)
면적 15,799.65㎢
언어 독일어
대륙 유럽
국가 독일

요약 독일에서 가장 북서쪽에 있는 주. 엘베 강 하류와 함부르크 주로부터 북쪽으로 덴마크까지 펼쳐져 있고, 동해안은 발트 해와 접하며 서해안은 북해와 맞닿아 있다. 지리적으로 대략 동부·중부·서부로 나누어진다. 서부는 부분적으로 경작이 이루어지는데, 평평하고 습하며 나무가 없는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인구가 도시에 살고 있으며, 인구가 집중된 도시들로는 킬·뤼베크·노이뮌스터·플렌스부르크 등이 있다.

목차

접기
  1. 자연환경
  2. 주민
  3. 경제
  4. 문화
  5. 역사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엘베 강 하류와 함부르크 주로부터 북쪽으로 덴마크까지 펼쳐져 있으며, 유틀란트 반도의 남반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 주의 동해안은 발트 해와 접하며 서해안은 북해와 맞닿아 있다. 발트 해에 있는 페마른 섬과 북프리지아 제도에 속하는 헬골란트·실트·포어·암룸 등의 섬들을 포함한다. 킬 시가 주도이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지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자연환경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대략 동부·중부·서부로 나누어진다. 동부에는 산과 호수가 많으며 비옥한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어 독일에서 가장 좋은 밀을 수확한다. 발트 해안을 따라 협만으로 만입되어 깎아지른 듯한 벼랑들이 있다. 중부에는 고지와 퇴석 지역이 있다. 토양이 황폐해서 경작이 이루어진 것은 2세기 정도밖에 안 된다.

서부는 부분적으로 경작이 이루어지는데, 평평하고 습하며 나무가 없는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호수·제방·연못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습지의 서쪽으로 조수의 영향을 받는 얕은 여울들과 평지가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매립한 뒤 잔디를 심어 목축지로 이용한다.

동해안은 바람·조수·파도·폭풍 등에 방치되어 항상 피해를 입는다. 기후적으로는 멕시코 만류의 영향을 받는 곳에 있어 겨울은 온화하며, 여름도 그리 덥지 않다. 높은 습도와 많은 강우량(연평균 760㎜)은 식물재배에 적합하다.

주민

대부분의 인구가 도시에 살고 있으며, 인구가 집중된 도시들로는 (행정·산업 중심지)·뤼베크·노이뮌스터·플렌스부르크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은퇴한 독일군들의 처리와 같은 어려운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대부분 소련의 붉은군대에 의해 동부에서 쫓겨온 100만 명의 독일 피난민과 도피자들로 이 주의 인구는 전쟁 전보다 약 50% 증가했다. 최근에 젊은 노동자들은 이 주를 떠나 함부르크 등으로 이주하는 경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메클렌부르크와 동프로이센 등지로부터의 인구유입으로 인해 인구 구성은 많이 변화되었다. 인구유입으로 이 지역 방언들은 쇠퇴했으나 홀슈타인 사투리(저지독일어)는 여전히 쓰인다. 북부에는 덴마크어를 쓰는 소수민족이 자신들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 주는 독일에서 개신교도의 비율이 가장 높다.

경제

농업은 이 지역 순경제생산의 1/10 이하이지만 아직도 전영토 중 대부분을 농업 용도로 사용한다. 이 지역의 농장들은 국외경쟁을 위해 구조를 합리화했으며, 1945년 이후로 많은 농지가 개혁되고 농산물 전문화가 일어났다. 농장, 식품가공 시설, 마케팅 사업 등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시키는 것이 점차적으로 농업체계의 특성이 되었다.

밀·설탕·사탕무·감자 등이 흔히 경작되는 곡물이다. 농가수익은 밭 작물보다 목축업에서 많이 얻어진다. 우유·우유가공품과 돼지·소 목축은 농장수입의 중요한 원천이다. 이 지역은 보안림에 있는 저지대이지만, 다른 지역 숲에 묘목을 공급하기 때문에 '독일 숲의 요람'이라고 불린다. 공업은 경제에서 점차적으로 중요해지고 있다. 제지·직물·의류와 킬 시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조선·기계제작·전기기술 등이 주요공업부문이다.

관광업도 중요하다. 긴 해안선과 전략상 중요한 위치는 수세기 동안 이지역을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발트 협만을 끼고 있는 뤼베크·킬·플렌스부르크 등에 큰 항구가 있다. 이곳을 가로질러 북해와 발트 해를 연결하는 킬 운하는 많이 이용된다.

문화

높은 교육수준으로 유명하다. 유서 깊은 킬대학교(1665)가 교육체계의 핵을 이룬다. 1964년 뤼베크에 의과전문대학이 부설되었다. 교육대학과 다른 많은 전문화된 고등교육기관이 있다. 흩어져 있는 마을들에는 대학교보다 낮은 수준의 김나지움이 있다. 주로 이 지방 역사와 관련이 있는 중요한 박물관이 50개 정도 있다. 성인교육과 도서관은 특별한 전통과 발전을 유지하고 있다. 킬에 있는 세계경제연구소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기관 중의 하나이며, 정치경제 분야의 크고 독특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다.

역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정북쪽에 있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은 이따금 덴마크, 스웨덴, 신성 로마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으로부터 배상·반환 요구를 받아야만 했다. 이 지역의 역사는 독일인 집단과 덴마크인 집단이 섞여 있어 경계 다툼과 주권분쟁의 연속이었으나 최근에는 화해상태이다. 19세기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때문에 생긴 덴마크와 프로이센 간의 장기분쟁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지역은 오랫동안 덴마크의 일부였으며, 현재는 슐레스비히 북단 만 덴마크에 속해 있다.

12세기에 슐레스비히는 공작령이 되었으며, 1864년까지 분쟁 없이 덴마크와의 공동영지로 남아 있었다. 홀슈타인은 좀더 독립적으로 발전했고, 수세기 동안 직할영지로 덴마크 왕의 통치를 받았지만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로 남아 있었다. 1815년 이후에 홀슈타인은 지금의 독일로 통합되었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에 거주하는 독일어와 덴마크어를 쓰는 각 소수민족의 권리, 덴마크 왕족의 계승권, 덴마크의 이권 등은 1840년경에 덴마크와 프로이센, 후에는 덴마크·프로이센·오스트리아 사이에 일어난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당시 슐레스비히 북부에는 덴마크인, 남부에는 독일인, 북부 도시와 중부에는 두 인종이 혼합되어 있었다. 홀슈타인의 주민은 거의 독일인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독일의 국민의식을 일깨웠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사이에 역사적으로 이어졌던 정치적 결속을 통해 이 두 지역을 통일된 독일에 속하는 하나의 지방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슐레스비히 북부의 덴마크인들 사이에서 반대운동이 전개되어 1838년에는 덴마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덴마크의 자유주의자들은 슐레스비히가 수세기 동안 덴마크에 속했으므로, 독일과 덴마크 사이의 국경선은 오랫동안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경계선으로 표시되었던 아이더 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덴마크의 민족주의자들은 슐레스비히가 덴마크로 통합되고, 그 과정에서 홀슈타인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열망했다. 반대로 독일민족주의자들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사이의 결합을 확고히 하고, 그 과정에서 슐레스비히가 덴마크로부터 분리되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다툼은 1848년 3월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대부분 구성하는 독일인으로 하여금 덴마크로부터의 독립 및 독일 연방과의 긴밀한 연합을 옹호하며 공공연한 폭동을 일으키게 했다.

이 폭동은 프로이센에서 파견한 군대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들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으로부터 덴마크 병력을 몰아냈다. 덴마크와 프로이센 간의 이 전쟁은 3년간(1848~50) 지속되었으며, 열강들이 1852년의 런던 회의 결과를 프로이센이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여 끝이 났다.

이 평화협정에 의해 독일연방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덴마크에 돌려주었다. 그 대신 덴마크는 1852년 런던 의정서에서 맺은 프로이센과의 협정에서 자매영지인 홀슈타인처럼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와 밀접하게 하기 위해 속박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1863년에 자유당 정부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9세가 덴마크와 슐레스비히 간의 새로운 협정에 서명하도록 설복시켰다. 따라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1852년 의정서의 지지자로서 중재가 자유로웠다. 계속되는 덴마크 전쟁(1864)에서 덴마크 군대의 저항력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의 2차례 단기전과 10월에 열린 빈 조약에 의해 힘을 잃게 되어, 크리스티안 9세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게 내주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새로운 영토를 얻기 위해 서로 싸웠으며, 1866년의 7주 전쟁(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결과 슐레스비히 북부의 덴마크어를 쓰는 다수 집단이 프로이센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불만의 소지를 만들었다. 1871년 독일제국 형성 후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문제는 슐레스비히 북부에 대한 독일과 덴마크 간의 분쟁으로 좁혀졌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전쟁을 종결시켰던 프라하 조약(1866)은 북부 슐레스비히가 이 지역 주민 과반수의 자유선거를 통해 덴마크와 재결합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으나, 1878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이 조항을 취소하는 데 동의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뒤인 1920년에 북부 슐레스비히의 북쪽과 남쪽 지역에서 분리선거가 있었으며, 이 선거로 각기의 주민들은 덴마크나 독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 북부 슐레스비히의 북쪽 지역에서는 70%가 덴마크와 통합되는 것을 선택한 반면, 남쪽에서는 80%가 독일에 남는 것을 택했다.

이때 결정된 슐레스비히에서의 덴마크와 독일 간의 경계선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더이상 분쟁은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독일지역은 서독의 주로 편입되었다(→ 아이더 강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