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헨리 슈어드

윌리엄 헨리 슈어드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H(enry) Seward 동의어 윌리엄 H. 수어드
요약 테이블
출생 1801. 5. 16, 미국 뉴욕 플로리다
사망 1872. 10. 10, 뉴욕 오번
국적 미국

요약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휘그당과 공화당에서 노예제에 반대했으며 1861~69년 국무장관을 지냈다. 1867년에 알래스카를 사들인 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슈어드의 바보짓'이라고 불렀다. 차츰 정치에 대한 안목을 키운 뒤 1828년에 반프리메이슨당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1830~34년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일했다. 이무렵 그는 앤드루 잭슨이 이끄는 민주당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손잡고 휘그당을 결성했다. 슈어드는 휘그당 소속으로 4년 동안 뉴욕 주지사로 일하면서 곧 휘그당의 노예제 반대파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 직전에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슈어드를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그는 링컨과 가장 가깝고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조언자였다. 국무장관으로 있으면서 내린 주요결정 가운데 마지막의 것은 1867년 러시아 영토인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사들인 것이었다.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휘그당과 공화당에서 노예제에 반대했으며 1861~69년 국무장관을 지냈다. 1867년에 알래스카를 사들인 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슈어드의 바보짓'이라고 불렀다.

1822년 뉴욕 주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며 이듬해 오번에서 개업했다. 차츰 정치에 대한 안목을 키운 뒤 1828년에 반프리메이슨당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1830~34년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일했다. 이무렵 그는 앤드루 잭슨이 이끄는 민주당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손잡고 휘그당을 결성했다. 슈어드는 휘그당 소속으로 4년 동안(1839~43) 뉴욕 주지사로 일하면서 곧 휘그당의 노예제 반대파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1849년 연방 상원의원으로 뽑혔는데, 상원에서 한 연설은 대부분 자유노동과 노예노동 사이의 적대 관계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혼란스러운 1850년대에 노예 문제에 타협하려는 휘그당의 시도에 차츰 반발하게 되었고, 휘그당이 무너지자(1854~55) 새로 결성된 공화당에 들어갔다. 공화당은 아직 주의 지위를 갖지 못한 준주에 노예제를 확대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슈어드는 공화당 당수로 인정받았지만,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으려는 그의 소망은 2차례(1856, 1860)나 좌절되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 직전(1861. 3)에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슈어드를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그는 초기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섬터 요새를 강화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링컨과 의견 차이를 보였으며, 외국과 전쟁을 벌여 국민의 관심을 국내의 갈등에서 다른 데로 돌리자는 무책임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에서 링컨과 가장 가깝고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조언자였다.

슈어드는 차츰 국무장관이라는 직책의 어려움을 감당해내면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특히 외국 정부들이 남부연합을 공식 승인하지 않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프랑스의 멕시코 점령을 막지 못했고 남부연합이 영국으로부터 전함 '앨라배마호'를 사들이는 것도 막지 못했지만,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나중에 미국이 이들 강대국과의 어려운 문제를 만족스럽게 조정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1862년에 노예 무역을 억제하기 위해 영국과 맺은 조약에서 그는 아프리카와 쿠바 해역에서 미국 선박을 수색할 수 있는 권한을 영국에 양보했지만, 미국 전함도 영국 선박을 수색할 수 있는 특권을 얻어냈다. 북군이 영국 선박에서 2명의 남부연합 첩자를 붙잡아 감금한 트렌트호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공해에서 선박을 수색하는 권한에 대해서는 영국이 미국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트렌트호 사건).

마차 사고로 중상을 입은 지 4일 뒤인 1865년 4월 14일 병상에 누워 있다가 그날 밤에 링컨을 암살한 존 윌크스 부스의 동료인 루이스 파월(가명은 루이스 페인)에게 목을 찔렸다. 그러나 기적처럼 회복하여 1869년까지 앤드루 존슨 대통령 밑에서 각료 자리를 유지했다. 그는 인기 없는 존슨의 재건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에, 존슨 대통령에게 쏟아지는 의회의 신랄한 비판을 같이 받았다. 국무장관으로 있으면서 내린 주요결정 가운데 마지막의 것은 1867년 러시아 영토인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사들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