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봉체

석봉체

다른 표기 언어 石峰體

요약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석봉 한호(韓濩:1543~1605)의 글씨체.

그의 호를 따서 붙여진 명칭이다. 한호는 사자관(寫字官) 출신으로 국가의 공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많이 썼고 중국에 서사관(書寫官)으로도 파견되었기 때문에 중국에까지 서명이 높았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송설체보다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바탕으로 자신의 서체를 완성했는데, 전서(篆書)·예서의 고자보다는 실용적인 해서·행서·초서의 각체에 더 뛰어났다.

왕세정(王世貞)이나 주지번(朱之蕃)이 그의 글씨를 극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선조 역시 그의 글씨를 아낄 정도로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자관으로서 글자 모양을 일정한 격식에 맞추려고 힘썼고 그가 공부한 당시의 왕희지 법첩은 모두 위작이거나 여러 차례 전각(轉刻)되어 많이 변화된 것이었으므로 격조와 운치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완당집〉에도 "석봉첩에는 아주 좋은 것도 있지만 극히 속(俗)한 것도 있다"라는 품평이 있다. 석봉체는 그뒤 사자관들에 의해 관부(官府)의 서체가 되었고 그가 쓴 〈석봉천자문〉은 학습자들의 교본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므로 영조·정조대까지 그의 서법이 풍미했다.

현존하는 그의 글씨로는 〈허엽신도비 許曄神道碑〉·〈서경덕신도비〉·〈기자묘비 箕子廟碑〉·〈행주승전비 幸州勝戰碑〉·〈선죽교비〉·〈좌상유용묘표 左相柳容墓表〉 등 비문이 대부분이다.→ 송설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