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

사헌부

다른 표기 언어 司憲府 동의어 상대, 霜臺, 오대, 烏臺, 백부, 栢府

요약 고려 초에는 어사대가 언론과 감찰을 관장했다. 원(元)에 복속된 명칭이 격하되어 사헌부로 바꾸었다가 1369년(공민왕 18) 확정되었고, 조선에서도 사헌부로 이어졌다. 왕권강화를 위해 신권을 계속 견제·제약하려는 국왕의 목적으로 사헌부 규모는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사헌부의 기능은 언론 기능, 정치참여 기능, 시종 기능, 서경 기능, 사법 기능 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언론 기능은 사헌부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서 간쟁·탄핵·시정·인사활동이 있다. 정치참여 기능은 정사에 의견을 개진하는 활동이다. 시종기능은 왕의 궁외행차를 호종하는 활동이다. 서경기능은 사령장·의첩을 심사·동의하는 활동이다. 법사기능은 법령 집행, 백관 규찰, 죄인 국문, 결송 등이 있다. 사헌부는 정치의 핵심기관으로서, 그 기능이 원만히 수행되면 균형있는 정치에 기여하지만, 비대해지거나 국왕·대신 또는 당파에 이용되면 큰 폐단을 낳을 수 있는 기관이었다.

상대(霜臺)·오대(烏臺)·백부(栢府)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이러한 기능을 담당한 것은 어사대(御史臺)였다. 어사대는 995년(성종 14) 중국 당(唐)·송(宋)의 관제를 받아들여 국초에 설치되었던 사헌대(司憲臺)를 개칭한 것이다. 1298년(충렬왕 24) 원(元)에 복속되어 관제의 명칭을 전반적으로 격하시키면서 이름을 어사대에서 사헌부로 바꾸었다. 이후 빈번한 관제변동에 따라 감찰사(監察司)·어사대·사헌부의 명칭이 반복되다가 1369년(공민왕 18) 사헌부로 정착되어 조선으로 이어졌다.

특히 1298, 1308년 장관인 대부와 대사헌이 각각 정2품과 종2품으로 승격한 것은 충선왕의 개혁정치와 관련된 사헌부의 기능강화와 지위 상승책에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은 건국 후 고려의 사헌부 제도를 계승했다. 그후 일부 관직명이 개칭되면서 〈경국대전〉의 편찬과 함께 명문화되었다. 사간원의 관원이 계속 감소된 것과 달리 사헌부 관원은 고려 이래의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는 왕권강화를 위해 신권(臣權)을 계속 견제·제약하려는 국왕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법제적으로 규정된 사헌부의 기능은 처음 성립할 때는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관리의 공과(功過) 고찰, 포거(褒擧)·탄핵하는 일이었다.

〈경국대전〉에는 여기에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며, 남위(濫僞)를 금하는 일 등이 추가되었다. 사헌부의 기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언론 기능, ② 정치참여 기능, ③ 시종 기능, ④ 서경 기능, ⑤ 사법 기능 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중 언론 기능은 사헌부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서 궁극적인 목적은 유교적 이상정치의 구현에 있었다. 여기에는 간쟁·탄핵·시정·인사활동이 있다.

간쟁은 왕의 언행에 잘못이 있을 때 바로잡는 것이다. 제도적으로는 사간원의 임무이나 사헌부에서도 담당했다.

탄핵은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는 것으로서 잘못을 저지른 관원을 탄핵하여 직위에서 축출하는 활동이다. 시정은 당시 정치의 시비를 논하는 것이다. 인사는 부정한 인사에 대해 탄핵하는 것이다. 이런 언론활동은 사간원·홍문관도 함께 수행했으므로 이들 3개의 관청을 대간(臺諫)이나 3사(三司)라고 불렀다.

언론기능에는 대사헌·집의·장령·지평이 참여하고 감찰은 관여할 수 없었다. 감찰은 중앙의 각 관서나 지방에 파견되어 감독기능만 수행했다. 이때문에 감찰은 감찰방(監察房)이라는 독자적인 집무실에서 방주감찰(房主監察)의 통솔하에 근무했다. 정치참여 기능은 왕이 의정부·6조 대신들과 함께 신하를 접견하여 보고와 자문을 받는 조계(朝啓)·상참(常參) 등에 참여하고, 여기에서 논의되는 정사에 의견을 개진하는 활동이다.

시종기능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여하고, 왕의 궁외행차를 호종하는 활동이다.

서경기능은 고신(告身:사령장)·의첩(依牒)을 심사·동의하는 활동이다. 고신서경은 사간원도 수행했는데, 그 범위가 고려시대에는 1품 이하의 모든 관원이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 변동되다가 5품 이하로 고정되었다.

법사기능은 법령의 집행, 백관에 대한 규찰, 죄인에 대한 국문, 결송(決訟) 등을 행하는 활동이다. 법령집행은 왕명에 따라 주로 금령을 단속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음주·수렵(狩獵)·음사(淫祀)·분경(奔競)·인신위조(印信僞造)·벌송(伐松)·천예기마(賤隸騎馬) 금지 등이 있다. 백관에 대한 규찰은 서울·지방의 모든 관원을 대상으로 공·사간의 부정·비위 여부를 살펴 탄핵·정정하는 것이다. 지방에는 분대(分臺:분사헌부)로서 감찰이 파견되어 이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다.

결송은 민사·형사 소송을 재판하는 것인데, 이또한 형조·사헌부·장례원 등과 함께 수행했다. 사헌부는 이러한 결송기능 때문에 형조·한성부(또는 의금부)와 함께 3법사(三法司)로 불렀다.

이처럼 사헌부는 의정부·6조·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과 함께 정치의 핵심기관으로서, 그 기능이 원만히 수행되면 왕권이나 신권의 독주를 막고 균형있는 정치에 기여할 수 있는 기관이었지만, 비대해지거나 국왕·대신 또는 당파에 이용되면 큰 폐단을 낳을 수 있는 기관이었다.

탄핵은 사실이 확인되는 경우는 물론, 풍문(風聞)에 의해서도 행할 수 있었다. 이때 대상관원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임무수행이 정지되며, 다시 직무를 보기 위해서는 제수(除授)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3사는 모두 중심활동인 언론(탄핵)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면책의 특권을 누렸다. 성종대말부터 선조 전기에는 이들이 의정부·6조의 권한을 제한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당쟁이나 세도·외척정치의 운영과 관련되어 당파나 세도·외척정치를 지속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또 조선시대 동안 간헐적으로 대간이나 3사 상호간에 탄핵이 행해졌다.

사헌부 관원은 재주가 뛰어나고 가계가 좋은 자를 임명했다.

또 홍문관·사간원 관원과 함께 승자(陞資)·체직(遞職)에서 의정부·6조 관원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외의 관원보다는 우대를 받았고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이중 정5품 지평과 정6품 감찰은 대개가 의정부·6조의 같은 품계의 관직에 체직되었고, 여기서 다시 2년 6개월 미만의 재직 후에 정4품과 정5품직에 승자·승직되었다. 사헌부 관원은 사간원 관원과 함께 고과(考課)를 받지 않았고, 당상관도 이들의 인사를 받으면 정중하게 답례하도록 규정하는 등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사간원에는 언론의 대상이 국왕인 점과 관련해 문과 출신자만 제수하고 근무시에도 상하관 사이에 격의가 없으면서 음주를 허용하는 등 분방했던 것과는 달리, 사헌부에는 음서 출신도 임명할 수 있었고, 근무할 때는 상하관 사이에 위계와 질서가 엄격했다.

또 사간원의 정언(正言)과 사헌부 감찰은 모두 정6품관으로 이들간의 위치는 관사의 격에 따라 감찰이 앞섰으나, 1471년(성종 2) 이후에는 언론대상과 관련되어 정언이 앞서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사헌부는 감찰 1명이 감소되는 변화를 겪으면서 한말까지 계속 존속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사간원과 함께 의정부 소속의 도찰원(都察院)으로 개편되면서 소멸되었다.→ 대간, 대사헌, 분대, 사간원, 3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