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방

4인방

다른 표기 언어 Gang of Four , 四人幇

요약 마오쩌둥의 3번째 부인인 장칭과 왕훙원·장춘차오·야오원위안을 가리킨다. 이들은 1965년 장칭이 우한의 극본 〈해서파관〉을 검열한 뒤 상연금지시킨 후 야오원위안이 공식적인 비판을 하면서 부상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사실상 문화대혁명의 시작이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확대되면서 공산당 내에서 4인방의 서열이 높아졌는데, 이들은 홍위병을 거느리고 지식교육, 과학·기술의 기초이론, 학생·교사 간의 관계와 학교교육, 지식인에 대한 정책 등의 4개 분야를 장악했다.
1969년 이후 4인방은 방송매체의 통제, 마오쩌둥의 정책과 노선에 대한 표면적인 지지로 권력을 유지했지만 1976년 마오쩌둥이 죽은 후에 권력을 잃고 감금되어 문화대혁명 동안의 정책에 대한 재판을 받았다.

마오쩌둥의 3번째 부인인 장칭[江靑]과 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을 가리킨다. 이들은 1966년 이전까지는 기존 권력구조 안에서 영향력이 크지 않은 하위직에 있었다는 점에서 그 배경이 비슷했다. 그리고 대중매체의 조작에 유능하고 마오쩌둥을 지지했으며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 주변의 온건관료들을 멀리하고 심지어 그들을 실각시키려고 했던 성향도 비슷했다.

이들은 1965년 장칭이 우한[吳晗]의 극본 〈해서파관 海瑞罷官〉을 검열한 뒤 그 정치적 성격을 문제삼아 상연금지시키고, 뒤이어 야오원위안이 공식적인 비판을 하면서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예술을 급진화하기 위한 선례를 구축했으며, 사실상 문화대혁명의 시작이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확대됨에 따라 정부와 공산당 내에서 4인방의 서열이 높아졌는데, 이들은 홍위병을 거느리고 지식교육, 과학·기술의 기초이론, 학생·교사 간의 관계와 학교교육, 지식인에 대한 정책 등의 4개 분야를 장악했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은 1969년 이후 4인방은 방송매체의 통제, 마오쩌둥의 정책과 노선에 대한 표면적인 지지로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이 죽은 후에 권력을 잃고 감금되어, 1980~81년에 걸쳐 문화대혁명 동안의 정책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장칭과 장춘차오는 교수형(나중에 감형되었음), 왕훙원은 무기징역, 야오원위안은 20년 징역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