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원위안

야오원위안

다른 표기 언어 Yao Weny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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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1, 저장 성[浙江省] 주지[諸&c5970;]
국적 중국

요약 중국의 정치가.
(병). Yao Wenyuan. (웨). Yao W대체이미지ny대체이미지an.

좌익작가 야오펑쯔[姚蓬子]의 아들로서 지식계급 출신이다. 1948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50년경 〈원이바오 文藝報〉의 통신원이 되었고, 그후 문화대혁명(이하 문혁) 이전까지 상하이[上海] 작가협회 이사를 지냈다. 문예잡지 〈맹아 萌芽〉의 편집위원 및 〈제팡르바오 解放日報〉의 주필을 역임했다.

1965년 당시 상하이 〈원후이바오 文匯報〉의 부편집장을 맡고 있던 그는 전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晗]의 역사극 〈해서파관 海瑞罷官〉과 덩퉈[鄧招]의 〈삼가촌찰기 三家村札記〉 등을 비판한 글을 상하이 〈원후이바오〉에 발표했는데 이 글은 문혁의 도화선이 된 평론으로 유명하다. 1966년 중앙문혁 조직원, 상하이 시 당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다.

1967년 상하이 시 혁명위원회 부주임이 된 그는 중앙문혁 조직에 문예조를 만들어 문학·희극·영화·음악·무용·도서 등을 통괄하게 되었는데, 이때 장칭[江靑]이 조장이었고 장춘차오[張春橋]·치번위[戚本禹]·야오원위안이 주요구성원이었다. 1967~68년 〈타오주[陶鑄]가 쓴 2권의 책을 평 함〉·〈노동자계급이 모든 것을 인도해야 함〉이라는 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69~73년 제9기의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상하이 시 혁명위원회 당 핵심소조 제1부조장, 상하이 시 제4기 당위 제2서기, 제10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5년 1월 제4기 전국인민대표회의 주석단원(主席團員)이 되었고, 2월 〈홍기 紅旗〉 제3호에 논문 〈린뱌오[林彪] 반당(反黨)집단의 사회적 기초를 논함〉을 발표했다.

그후 중국 보도기관의 최고책임자로 있었지만 1976년 10월초 이른바 4인방사건(四人幇事件)의 일원으로 체포되었으며, 29일자 신화통신사는 장춘차오·왕훙원[王洪文]·야오원위안 세 사람의 모든 당직이 박탈당했음을 발표했고, 1977년 7월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의 복권과 4인방의 당적박탈 및 영구추방을 결정했음을 공식 발표했다. 야오원위안은 1981년 1월 징역 20년, 공민권 박탈 5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