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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위치 오스트리아 북동쪽 도나우 강 연안
인구 1,975,000명 (2023년 추계)
면적 415㎢
대륙 유럽
국가 오스트리아

요약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며 주. 도나우 강을 따라 자리잡고 있으며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관문 역할을 한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요하네스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많은 서양 음악가들이 이곳을 그들의 본거지로 삼았다.

목차

접기
  1. 문화
  2. 역사
빈

도나우 강을 따라 자리잡고 있으며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관문 역할을 한다.

1558~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 중심지였고, 그후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지였다. 품위있고 거대한 문화적 위업을 이룬 도시로서 건축과 음악으로 유명하다.

빈은 판노니아 분지가 서쪽의 알프스 고산지역을 향해 높아지기 시작하는 곳에서 도나우 강과 접하고 있다. 시내에서 가장 높은 지역은 빈 삼림지대인데 이곳은 대체로 반원형인 4개의 계단식 대지를 이루면서 도나우 강을 향해 가파르게 낮아진다.

지도

전형적인 중부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1월평균기온은 -0.5℃이고 7월평균기온은 19.5℃이다. 연간강우량은 660㎜ 정도이다. 경제기반은 무역업과 공업이며, 주요공산품으로는 전기기구·종이·의류·공작기계가 있다. 시 정부는 많은 사업체를 경영하는 등 경제에서 큰 역할을 한다.

문화

빈의 화려한 역사를 보여주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이곳의 유명한 건물들 중의 하나인 성 스테파누스 성당은 12세기 중엽에 세워졌다가 화재로 손실되어 200년 후 재건되었다. 다른 중요한 중세기 건물로는 13세기말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의 성인 호프부르크, 14세기 미노리텐키르헤 교회, 마리아암게슈타데 교회가 있다. 17세기말이 되면서 플라구에콜룸 같은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빈 지역에서 바로크 양식은 70년 이상 유행했으나 마침내는 링 건축양식에 대체되었다. 링 양식의 건축물들은 링슈트라세를 따라 일렬로 늘어서 있으며, 그중에는 신(新)프랑스르네상스풍의 국립 오페라관, 의(擬)고딕식의 포티페 교회, 신이탈리아르네상스풍의 빈대학교, 신플랑드르고딕식의 라트하우스(시청) 등이 있다.

빈은 건축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수세기 동안 세계적 중심지였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요하네스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많은 서양 음악가들이 이곳을 그들의 본거지로 삼았다. 티롤 민속춤에서 파생된 왈츠는 1820년에 이곳에서 확립되었으며, 그 직후에 위대한 빈 오페레타 시대가 개막되었다.

또한 세계적으로 뛰어난 교향악단 중의 하나인 빈 관현악단(비엔나 필하모닉)의 본거지이다.

빈에는 30개 이상의 박물관이 있다. 호프부르크 성의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이 시의 가장 돋보이는 소장품 중의 하나는 합스부르크가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의 왕관이다. 이 성에는 또한 세계 최대 규모의 그래픽 아트 수집품이 있는데, 100만 점 이상되는 이 수집품에는 렘브란트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미술사박물관에는 합스부르크가에서 수집한 옛 명작들이 소장되어 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옛 집들은 현재 박물관이 되었다. 또한 지하철이 빈 도심부를 일주하며 교외로 뻗어 있다. 철도가 북·남·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주요 간선도로들이 방사형으로 사방에 퍼져나간다. 빈 국제공항은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18km 떨어진 슈베하트에 있다.

역사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인데 철기문화시대에는 빈도보나라고 불린 켈트족의 요새도시가 되었다.

로마인이 BC 1세기에 이 켈트족의 영토를 합병했을 때에도 지명은 그대로였으며 성채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로마의 보호 아래 일반시민의 거주가 촉진되어 3세기경에는 인구 2만을 헤아리는 자치도시가 되었다. 성채와 마을은 5세기의 민족이동에 의해 소란기에 소멸했지만 그 일부가 남아 중세도시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 기초에 의해 오늘날 빈의 중심부가 결정되었다.

시는 881년의 기록에 다시 등장하는데 그때의 이름은 베니아였다.

1156년에는 바벤베르크가(家) 지배지역의 수도가 되어 급속히 그 중요성이 커졌다. 1137년에는 이 도시에 특허장이 수여되었고 1221년에는 상업독점권이 인정되어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십자군이 성지로 발진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도이치 기사단의 후원자가 되었다. 1558~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사실상의 수도가 되었고 그후 1867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1867~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이 도시는 쇠퇴의 기미를 보였다.

예를 들면 16세기에 시민과 합스부르크가와의 싸움이 있었으며, 특히 전쟁의 무대가 되어 여러 번 전화를 입었다. 13~17세기에 시역은 빈 강과 후년의 도나우 운하와의 사이에 놓여져 있었다. 빈의 건축물은 여러 번 개축된 것이 많은데 특히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많다. 시의 성벽은 15~16세기에 더욱 큰 성벽으로 개축되었고 교외지구를 지키는 외측의 소성벽은 1704~60년에 축조되었다.

그러나 대성벽은 1860년대에 폭 56m의 환상도로(링슈트라세)로 바뀌었다.

대성벽과 소성벽의 사이는 1828년까지 시가지화되었고 그 이외에는 오래전부터 귀족의 거주지가 있던 곳을 제외하고는 무계획적으로 건물이 들어선 곳이 많다. 오래전부터 발전한 또하나의 지구로는 현재 도나우 운하 좌안에 있는 유대인 거리로서 17세기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지구는 일찍이 왕실수렵지의 일부로서 나머지 수렵지는 현재 프라타라고 불리는 자연공원이 되어 있고 그 일부에는 유원지와 무역박람회가 개최된 곳이 있다. 도나우 좌안은 교외공업지구인데 19세기 후반 시역이 확대된 것은 공업화가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의 인구는 1840년의 약 44만 명에서 1910년에는 2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는데 이에 따라 교외에는 노동자의 광대한 주택지가 개발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시가지의 연변, 특히 서부와 북서부에 고급주택지가 생겨나면서 중심지구 및 오래된 교외의 건물은 약 3/4이 교체되었다.

현재 시에 편입되어 있는데 많은 촌락에는 다소 농촌의 그림자가 남아 있어 빈의 도시 풍경에 독특한 풍취를 주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빈이 1922년 1월 1일 연방주가 되면서 시당국이 건설한 거대한 아파트 군이다(→ 제3제국). 이 아파트의 일부는 1934년 비합법적인 사회당이 돌푸스 독재정권에 반대하여 일으킨 무장봉기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 계획되어 추진중이던 아파트 건설은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 중단되었다. 이 대전의 후반에 빈은 커다란 손실을 당하여 가옥 파괴가 27만 채, 공공건물과 대공장은 1/4이 파괴되었다.

1945년 빈이 다시 오스트리아의 수도 겸 연방주가 되었을 때 도시의 부흥은 난관에 부딪쳤는데, 연합군에 의한 분할점령과 물자·자금의 부족이 큰 원인이었다. 전후 시당국에 의해 건설된 아파트 군은 건폐율이 약 25%에 달해 전쟁 전보다 여유있게 되었고 소 아파트 군은 총 건축실적의 75%를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