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

비용

다른 표기 언어 François Vil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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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31, 프랑스 파리
사망 1463 이후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위대한 서정시인.
본명은 Fran대체이미지ois de Montcorbier, Fran대체이미지ois des Loges.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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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
  3. 평가

개요

중세 파리에서 추방당하거나 감옥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범죄자로 유명했다.

그의 주요작품은 〈유증(遺贈) 또는 소(小)유언집 Le Lais ou Le Petit Testament〉·〈대(大)유언집 Le Grand Testament〉, 그리고 다양한 발라드와 풍자가요 및 롱도등이다.

생애

비용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죽었고, 그는 생브누아르베투르네 성당의 주임 신부인 기욤 드 비용 참사회원 밑에서 자랐다.

파리대학교 예술학부의 학적부에는 1449년 3월에 학사학위를 받았고 1452년 5~8월에 석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455년 6월 5일 생브누아 성당 구내에서 그와 술취한 몇몇 친구 및 필리프 세르무아즈라는 수도승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비용은 그만 이 수도승을 단칼에 찔러죽이고 말았다. 그는 파리에서 추방되었지만 1456년 1월에 왕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크리스마스 직전에 그는 나바르 중학교에서 일어난 절도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파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무렵 그는 "유증"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는데, 편집자들은 이것을 〈소유언집〉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이 작품은 친구와 친지 및 파리를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남기기 위해 풍자적으로 착상한 것인데, '유품'의 목록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단골 이발사에게 자신의 잘라낸 머리카락을 남겼다. 또 동네에서 유명한 3명의 고리대금업자에게는 몇 푼의 잔돈을, 형사법원 서기에게는 자신의 칼(이것은 담보로 저당잡혀 있었음)을 남겼다.

그는 아마 파리를 떠난 뒤 앙제로 가서 한동안 머물렀을 것이다.

그가 블루아로 가서 역시 시인인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영지에 머문 것도 분명하다. 이곳에서 그는 못된 짓을 저질러 다시 투옥되었지만, 이번에는 1457년 12월 19일에 샤를의 딸 마리 도를레앙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일반 사면령이 선포된 덕분에 형을 면제받았다. 비용은 〈나는 샘물 옆에서 목말라 죽는다 Je meurs de soif auprès de la fontaine〉라는 발라드를 공작이 주최한 시 경연대회에 출품했는데, 공작은 비용이 쓴 몇 편의 시(어린 아기에게 바친 〈마리 도를레앙에게 보낸 편지 Épître à Marie d'Orléans〉를 포함)를 자기 작품의 필사본에 옮겨 쓰게 했다고 한다.

얼마 후 비용은 부르주·부르보네 지방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르보네에서는 아마 물랭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1461년 여름 내내 그는 또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루이 11세가 순방길에 죄수들을 모두 풀어준 10월 2일에야 비로소 석방되었다.

다시 자유의 몸이 된 비용은 가장 긴 작품 〈유언집〉(통칭 〈대유언집〉)을 썼다.

이 작품은 185연의 8행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합해 2,023개의 8음절 시행에 해당한다. 이 작품에는 많은 정형시, 주로 발라드(대개 3연의 10행 시에 4~7행의 맺음말을 덧붙인 시)와 풍자가요(다양한 운율과 다양한 운문 형식으로 지은 노래)가 섞여 있어 단조로운 8행시에 변화를 준다. 이 발라드와 풍자가요의 일부는 그가 전에 써놓았던 작품들이다. 〈대유언집〉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질병과 감옥, 노화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표현한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 헛되이 보낸 젊은시절과 낭비해버린 재능을 후회하고 있다. 그는 파리 지하세계의 술집과 매음굴을 재현하고 술과 방탕 속에 빠져 있는 많은 옛 친구들, 그가 〈유증〉에서 갖가지 '유품'을 남겼던 친구들을 회상한다. 그러나 여기서 비용의 말투는 초기 작품보다 훨씬 더 통렬하며, 훨씬 더 냉소적이고 초연한 태도로 글을 쓰고 있다.

비용은 묑쉬르루아르의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1462년 다시 강도죄로 체포되어 파리의 샤틀레 감옥에 갇혔다.

그는 11월 7일 석방되었지만, 이듬해에는 파르슈민리 거리에서 일어난 싸움에 말려들어 다시 투옥되었고 이번에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수로 갇혀 있는 동안 그는 〈교수형을 받은 사람들의 발라드 Ballade des pendus〉·〈비용의 묘비명 L'Épitaphe Villon〉이라는 뛰어난 작품을 썼는데, 여기서 그는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모습과 썩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상상하여 인간들의 '정의'를 신에게 상고한다.

〈나는 프랑수아예요. 그들이 나를 붙잡았어요. Je suis Fran이미지oys, dont il me poise〉라는 유명한 4행시를 쓴 것도 여기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하여, 1463년 1월 5일 사형 대신 10년 동안 파리에서 추방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후로는 아무도 두 번 다시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비용의 생애는 비록 범죄로 얼룩졌지만, 그가 중세 학교에서 엄격한 지적 훈련을 받은 학자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시가 우리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놀라운 운율구사와 엄격하게 통제된 구성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그가 머리에 떠오르는 영감을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시의 형식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매춘부인 친구에게 쓴 발라드 〈나에게 그토록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가짜 미인 Fausse beauté , qui tant me couste chier〉은 이중 압운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처음 2연을 이루는 시행들의 첫 글자를 짜맞추면 프랑수아와 마르트라는 이름을 이루도록 되어 있다.

시 속에 절들을 배열하는 것조차도 미리 정해진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어떤 순서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절묘한 우연의 결과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당대의 작시법과 작문 규칙을 더 잘 안다면 비용의 기술적 능력에 대한 평가는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비용의 인생을 중세적 '자유분방한 생활'(vie de bohème)로 해석하는 낭만적 견해(이런 생각은 비용을 '저주받은 시인'으로 간주한 19세기의 상징파 시인 아르튀르 랭보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음)는 근대 비평가들의 도전을 받았다.

데이비드 쿤은 그 시대에 널리 유행했던 신 중심의 성서 해석 방식에 따라, 비용의 시가 어떤 식으로 문자적·비유적·도덕적·영적 의미를 지니는가를 검토했다. 그는 〈대유언집〉에서 비용이 각 연에 붙인 숫자의 의미를 분석했는데, 그의 해석이 옳다면 〈대유언집〉은 여러 차원에서 해석해야 하는 우주적 의미를 가진 시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제33연(이 숫자는 그리스도의 나이와 같음)은 예수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 쿤의 생각이다. 이것을 '길 잃은 아이'의 머리에 아무렇게나 떠오른 영감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평가 피에르 기로는 비용의 시를 암호로 간주한다. 이 암호를 풀면 부르고뉴의 한 성직자가 파리의 판사들과 변호사들을 비웃는 풍자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비용이 전통적인 시 형식을 잘 알고 있었으며 예민한 역사의식을 가진 교양인이었다는 것은 시 자체를 보아도 분명하다. 그는 13세기 언어를 풍자적으로 흉내내어 고대 프랑스어로 발라드를 썼다. 〈대유언집〉은 장 보델의 〈작별 Congés〉의 전통, 즉 아당 드 라 알과 장 보델 등 그보다 앞서 활동한 시인들이 여행을 떠날 때 쓴 시의 전통을 직접 따르고 있다.

이런 형식에 속하는 시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 아마도 비용의 〈대유언집〉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 발라드에서는 "하지만 작년에 내린 눈은 어디 있는가?"(Mais où sont les neiges d'autant?)라는 유명한 후렴이 주문처럼 되풀이된다.

비용에 대한 이런 통찰의 일부가 아무리 억지로 갖다 붙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가 풍부한 학식을 갖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볼 때 이 시인이 사상의 깊이와 의미 및 중요성을 자신의 작품에 부여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비용의 작품에 대한 '지적' 접근방식은 그 작품의 격렬한 솔직함에서 벗어나서도 안 되고, 그가 실제로 겪은 고통스러운 개인적 경험에 대한 충실성이야말로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일반적인 믿음을 부인해서도 안 된다.

그러한 영감과 더불어 그는 대체로 전통적 주제인 깨어진 일련의 환상, 사라진 과거에 대한 후회, 배신당한 사랑의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염병과 재앙 및 대량학살과 전쟁으로 얼룩진 당대의 문학과 예술에 그토록 자주 나타나는 무시무시한 죽음의 공포 등을 조명했다.

비용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지만, 이만한 지식이나마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주로 19세기 프랑스의 학자 오귀스트 롱뇽이 끈기있게 조사한 결과이다.

롱뇽은 이 시인과 관련된 수많은 역사적 자료(그 대부분은 법원의 재판기록임)를 발굴했다. 그러나 1463년 파리에서 추방된 뒤, 비용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도 그의 시가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늘날 약 3,000행의 시가 남아 있는데, 그 대부분이 1489년 파리의 서적상인 피에르 르베에 의해 출판된 것이다.

르베가 편집한 책은 16세기에 나온 20여 권의 책의 토대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 이외에도 12편의 발라드와 롱도(기본적으로 세련된 이중 각운을 가진 13행시), 그의 작품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4편의 발라드와 롱도, 그리고 당시의 은어로 씌어진 7편의 발라드가 있다. 나중에 라블레는 이 시인에 대해 2편의 이야기를 썼는데, 하나는 비용이 영국으로 갔다는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푸아투의 생메크상 수도원으로 피난처를 찾아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느 이야기도 신빙성이 없으며, 비용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평가

비용은 프랑스의 서정시인들 가운데 가장 깊은 감동을 주는 시인일 것이다.

그는 음주와 매춘을 주제로 다루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쓴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발라드 형식의 기도문에서는 감상이 아닌 겸손을 보여준다. 그는 놀랄 만큼 솔직하게 사랑과 죽음을 이야기하며 고통받는 모든 인류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나타내고, 헛되이 보낸 과거에 대한 후회를 가슴 아프게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은 중세의 종말을 나타내며, 흔히 '길 잃은 아이'의 영감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그당시의 시적 전통과 원칙을 더 알게 될수록 이런 해석은 타당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 비평가가 말했듯이, 비용의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때가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학자들은 아직도 비평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겠지만, 비용의 생애와 시대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으로도 그를 천재 시인으로 부르기에 충분하다. 그의 작품은 의미와 위대한 감정의 힘으로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