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라블레

프랑수아 라블레

다른 표기 언어 François Rabelais 동의어 라블레
요약 테이블
출생 1494경, 프랑스 푸아투
사망 1553. 4. 9(?),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라블레는 동시대인들에게는 뛰어난 의사이자 인문주의자로, 몽테뉴와 함께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꼽힌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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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초기소설들
  4. 후기작품들
  5. 영향과 평가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Rabelais)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Rabelais)

개요

동시대인들에게는 뛰어난 의사이자 인문주의자였으며, 후세 사람들에게는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걸작 〈팡타그뤼엘 Pantagruel〉(1532)과 〈가르강튀아 Gargantua〉(1534)의 저자로 유명하다(→ 색인:〈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초기생애

라블레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빈약할 뿐 아니라 해석하기도 어렵다.

그는 투렌의 부유한 지주이자 1527년에 푸아투의 '국왕 대리인'을 대행했던 유명한 법률가 앙투안 라블레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블레도 법률을 공부한 것이 분명하지만, 1510년경에 라보메트에서 프란체스코회의 수련수사가 되었다가, 후에 푸아투의 퐁트네르콩트에 있는 퓌생마르탱 수도원으로 옮겼다. 늦어도 1521년에(이보다 더 일렀을 수도 있음) 그는 사제서품을 받고 성직자가 되었는데, 이 진급은 프란체스코회의 전통을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라블레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프란체스코회의 자유주의적 인문주의자 피에르 아미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524년에 두 학자는 그리스어로 책을 썼는데, 지나치게 정통적인 수도원의 상급자들은 그리스어를 '이교도'의 언어로 생각하여 한동안 이 책을 몰수했다. 이 책은 원래의 신약성서를 소개하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겐 같은 그리스의 교부들에 대한 연구를 장려했다. 두 학자는 그들의 수도원에서 잠시 연금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라블레는 그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특별허가를 얻어, 그의 담당 주교인 조프루아 데스티사크가 원장으로 있는 생피에르드마유제의 베네딕투스회 수도원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이 수도회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고, 후에 프란체스코회의 결점은 가볍게 넘겨버리면서도 베네딕투스회는 신랄하게 풍자했다.

라블레는 파리의 생드니 회관에서 베네딕투스회의 후원으로 의술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1530년에 그는 서원을 깼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환속을 위한 탄원 Supplicatio pro apostasia〉에서, 교구 사제가 입는 법의를 입고 정기적으로 미사를 집전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몽펠리에에서 후원자인 조프루아 데스티사크의 도움으로 의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그는 몇 주일 만에 의학공부를 마친 뒤 유명한 고대 그리스 의사들의 저서에 대해 강의하고, 1532년에는 히포크라테스의 〈격언집 Aphorisms〉과 갈레노스의 〈육아법 Ars parva〉을 직접 편집하여 출판했다.

의사로서 그는 고대의 권위자들에게 크게 의존했고, 히포크라테스의 플라톤 학파를 지지했지만 갈레노스와 아랍의 의학자이자 철학자인 이븐시나도 추종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과부와 관계하여 두 아이(프랑수아와 쥐니)를 낳았는데, 교황 파울루스 4세는 1540년에 이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성을 부여하고 라블레의 합법적인 적출자로 인정했다. 3번째 아이인 테오뒬은 라블레가 친자로 인정했지만 어릴 때 죽었다.

초기소설들

라블레는 나르본에서 잠시 개업의로 일한 뒤, 1532년에 리옹의 시립병원 의사로 임명되었다.

그해에 그는 동시대의 이탈리아 의사인 조반니 마나르디가 쓴 의학 서한들과 라틴어 유서를 편집하여 출판했는데, 유서는 나중에 위조 문서로 밝혀졌다. 11월 30일에 그는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에게 열렬한 편지를 썼다. 그가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한 것은 이무렵이었다. 그는 저자를 알 수 없는 통속소설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 귀중한 연대기 Les Grandes et inestimables cronicques du grant et énorme géant Gargantua〉가 성공한 것에 자극을 받아, 첫번째 장편소설 〈팡타그뤼엘〉을 가명으로 발표했다.

이 소설은 그의 이후 작품들보다 길이가 짧고 지적 깊이도 부족하지만, 그때까지 프랑스의 어떤 비슷한 문학 장르에서도 그만큼 뛰어난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라블레는 언어에서 느끼는 기쁨, 언어 자체의 유희에 대한 탁월한 감각, 익살스러운 상황과 독백 및 대화와 행동에 대한 능숙한 처리, 그리고 언어만으로 환상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이야기꾼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영웅시풍의 기사도 소설의 테두리 안에서 그는 법률의 반계몽주의와 신비주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형의 궤변을 비웃었지만, 그래도 소르본 신학교가 존중하는 스콜라 철학보다는 이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팡타그뤼엘〉 중 특히 한 장(章)은 그 전체적인 진지함으로 인해 두드러지는데, 거기에서 그는 다산적(多産的)인 부부관계를 아담의 타락이 초래한 죽음을 보상하기 위해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서 찬양했다. 그리스도교도는 합법적인 상속자를 낳을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들들이 자신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충실히 비추는 거울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라블레의 주장이었다.

이 작품은 팡타그뤼엘의 나라인 유토피아와 딥소드(그리스어로 '부패한 사람'의 뜻)들의 싸움을 언급하면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를 공공연히 모방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루터파의 교리(신과 천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강제로 복음을 전파할 수 없다는 교리)를 유쾌하게 설교하고 있다. 〈팡타그뤼엘〉은 팡타그뤼엘의 친구인 교활하고 재치있는 건달 파뉘르주가 처음 등장하는 책으로도 기억할 만하다.

그는 이 성공적인 소설에 뒤이어 책력(冊曆)을 우스꽝스럽게 모방한 〈팡타그뤼엘의 예언 Pantagrueline Prognostication〉을 발표했다.

책력들은 특히 1524년에 행성들이 같은 황도(黃道) 위에 줄지어 늘어서는 행성 대결합이 일어난 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점점 더 강하게 사로잡아가던 점성학적 예언들을 반영하고 있었다. 의사로서 라블레는 예언서를 쓸 수 있었고, 실제로 썼다. 그러나 그는 '판단력을 가진'(본질적으로 미래의 운수를 판단하는) 점성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점성술을 공격하는 저자들과 합세했다. 여기서 그의 풍자 형태는 독일의 라틴어 저서들을 많이 모방하고 있지만, 질적으로 그것을 앞서고 있다. 라블레는 1534년에 갑자기 시립 병원을 그만두고 파리의 주교인 장 뒤 벨레와 함께 로마로 갔다.

그는 그해 5월에 리옹으로 돌아와, 로마를 묘사한 바르톨로메오 마를리아니의 〈고대 로마 지지(地誌) Topographia antiquae Romae〉를 편집하여 출판했다. 그는 다시 시립병원으로 돌아갔지만, 1535년 2월에 갑자기 그곳을 떠났다. 이것은 아마 미사의 '우상 숭배'를 공공연히 비난하는 포스터가 프랑스 전역에 붙었던 종교개혁 사건인 '벽보사건'(1534. 10)으로 인한 신교도 박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경의 권위에 의지하여 종교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가톨릭 복음주의자들조차도 '루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고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르강튀아〉는 이 무렵에 쓴 작품이다. 제2판은 출판연도가 1535년으로 되어 있다. 초판은 오늘날 1부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속표지가 떨어져나가 출판 연도를 알 수 없다. 이 걸작은 부분적으로는 장 뒤 벨레가 지지하는 왕당파의 대의명분을 지원하기 위해 쓴 것이다.

1535년 5월에 장 뒤 벨레는 주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힘입어 추기경이 되었다. 왕과 추기경, 그리고 추기경의 형제이며 랑제의 영주인 기욤 뒤 벨레는 루터파의 분열을 끝내고 프랑스 교회를 다시 구교로 개혁하려는 교회일치운동을 지원받고 싶어 독일의 신학자 필리프 멜란히톤과 접촉하고 있었다. 한편 소르본 신학교의 완고한 스콜라 학자들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가르강튀아〉는 이러한 대의명분을 촉진하고, 박해 자체를 비난하면서 박해에도 불구하고 확고부동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라블레는 소르본 신학교를 조롱하고 복음주의를 전파했다. 〈가르강튀아〉에서 라블레는 팡타그뤼엘의 아버지인 거인 가르강튀아의 출생과 교육 및 용기를 이야기하면서, 영웅시풍의 모험소설을 계속 탐구하고 있다. 풍자(예를 들면 신비주의적 문장(紋章) 숭배를 시시한 것으로 만드는 무지를 조롱하고, 잘못된 문장학 이론을 비웃는 것 따위)는 대부분 궁정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의 풍자는 대부분 유식한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 그는 임신기간이 11개월이나 심지어는 13개월이라고 주장하는 의사와 전통주의적 법률가들을 조롱하고 인문주의자들을 지지한다.

스콜라 철학의 구식 교육법을 조롱하면서 인문주의가 이상으로 삼는 인간상, 즉 예술과 과학 및 기술을 광범위하게 배우고 기사의 무술에도 뛰어난 솜씨를 가진 그리스도교도 군주를 거기에 대비시킨다. 정치에서 라블레는 호전적인 기질에 반대하고 유화정책을 지지하지만, 그리스도교도 군주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유화정책에 성공하지 못하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르강튀아와 그의 이웃인 '성미가 까다롭고 화를 잘 내는' 피크로콜의 전쟁은 한편으로는 라블레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풍자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와 이 제국의 세계정복 계획에 대한 풍자이기도 했다. 가르강튀아는 작전을 지휘하지만, 공적의 일부는 장 수도사(베네딕투스회 수사)가 세운다. 비쩍 마르고 호색적이며 더럽고 무식한 장 수도사는 "이 세상에 진짜 수도승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가 진정한 수도승"이라고 풍자되지만, 그의 동료들이 기도문의 '헛된 반복'에서나 즐거움을 얻는 겁쟁이요 게으름뱅이인데 비하면, 그의 유쾌함과 적극성은 그를 한결 호감가는 인물로 만들어준다.

가르강튀아의 마지막 주요사건은 가난과 금욕 및 복종을 자율의 이름으로 거부하는 텔렘 수도원의 건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수도원은 부자와 명문 집안 태생을 환영하고, 귀족적인 생활을 찬양하며 행복한 결혼을 축복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수도원은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가르강튀아〉 이후 11년 동안 라블레는 그의 2개의 작품에서 지나칠 만큼 대담한 종교적 의견을 이야기한 대목들을 신중히 수정했을 뿐 새로운 작품은 전혀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장 추기경과 그의 유력한 형제 기욤의 전속 의사로 일했다. 1535년 2월에 시립 병원을 떠난 뒤, 그는 추기경과 함께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그는 '환속'(즉 베네딕투스 수도회에서 허락을 받지 않고 수도원을 떠난 것)을 변명하는 '탄원'을 제출하여 자신의 입장을 합법화하고, 생모르레포세에 있는 추기경의 베네딕투스회 수도원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었다.

이 수도원은 6개월 뒤에 세속화했고, 라블레는 교구 사제가 되어 의사 일을 계속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537년에 그는 뷔데와 클레망 마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동료 인문주의자인 에티엔 돌레가 감옥에서 석방된 것을 축하하는 유명한 잔치에 참석했다. 돌레는 라블레의 작품을 수정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도용했기 때문에, 라블레는 나중에 돌레와 싸웠을지도 모른다. 1537년 5월 몽펠리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히포크라테스의 〈예후집 Prognostics〉을 강의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카를 5세가 프랑수아 1세를 만난 1538년 7월에 그는 에그모르트에 있었지만, 그가 기욤 뒤 벨레를 따라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지방으로 가서 토리노와 페라라를 방문할 때까지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1542년 말에 기욤은 리옹으로 떠났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인 1543년 1월에 라블레를 비롯한 여러 의사들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라블레는 이 중요한 사건을 그의 작품에서 2회 언급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이 특별한 전조를 보냈고 죽음의 병상에 누워 있는 기욤에게 예언능력을 부여했다고 믿었다. 기욤의 죽음은 영웅의 상실을 의미하는 동시에 후원자의 상실도 의미했다.

같은 해에 조프루아 데스티사크도 죽었고, 소르본 신학교와 파리 고등법원은 입을 모아 라블레의 소설을 비난했다. 라블레는 국왕의 누이인 나바라의 여왕 마르그리트에게 〈제3서 Tiers Livre〉(1546)를 헌정하여 그녀의 보호를 받으려고 애썼다. 이 책은 왕의 '윤허'(인쇄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소르본 신학교는 이 책이 나오자마자 이단으로 비난했다. 이에 라블레는 메스(제국 도시)로 달아나 154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후기작품들

〈제3서〉는 라블레의 가장 심오한 책이다.

이 작품에서 팡타그뤼엘은 스토아 철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따르는 완전무결한 현인으로 성장했고, 자신을 사랑하며 악마에게 현혹당한 파뉘르주는 이제 검은 것을 흰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솜씨를 갖고 있다. 파뉘르주는 망설인다. 과연 결혼을 해야 할 것인가? 아내에게 배신당하거나 얻어맞거나 강탈당하지는 않을까? 그는 훌륭한 플라톤 철학의 예언들과 보다 덜 훌륭한 예언들을 수없이 참고하지만, 어떤 예언도 그의 이기심 때문에 아무 효과가 없다. 인간의 관능에 대한 그의 생각은 '건전한' 히포크라테스의 개념이 아니라 '잘못된' 갈레노스의 개념이다.

그는 박식한 거인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훌륭한 신학자와 플라톤주의 철학자인 의사 및 회의주의 철학자와 의논하지만, '어리석은' 브리두아는 그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브리두아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다룰 때 로마법이 그러하듯이 신의 섭리를 믿고, 제비뽑기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이다. 파뉘르주는 아무도 믿지 않고,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신성한 술병'의 신탁을 들어보기로 결심하고, 여행자들은 신전을 향해 떠난다.

브리두아 덕분에 이 소설은 그리스도교의 '어리석음'을 역설적으로 옹호하게 되는데,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Praise of Folly〉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그보다는 라블레가 이해하는 바 사도 바울로에게서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제3서〉가 비난을 받은 이유는 아마 고해성사를 조롱하고 결혼문제에서 교회법을 민법에 종속시켰을 뿐 아니라(라블레는 부모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결혼의 법적 효력을 부인했음)수도원 문제에 민간이 개입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대마초의 숱한 사용법을 찬양하는 거짓 찬가와 함께 수수께끼처럼 끝난다. 그리하여 이 마지막 부분은 파뉘르주가 심술궂은 말투로 빛을 찬양하는 책의 첫부분과 미학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1547년부터 라블레는 다시 장 추기경의 전속 의사로서 그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그와 함께 토리노와 페라라 및 볼로냐를 거쳐 로마로 갔다. 리옹을 지나갈 때 그는 인쇄업자에게 아직 완성하지 않은 〈제4서 Quart Livre〉 원고를 넘겨주었는데, 이 책은 마지막 문장이 끝을 맺지 않고 중간에서 끝난 상태로 1548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라블레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이야기가 몇 개 담겨 있지만, 또한 '신인 협력설' 신학(인간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과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설)도 옹호하고 있다. 로마에서 그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둘째 아들 오를레앙의 루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장 추기경이 주도한 '스키오마키'(모의전쟁)를 묘사한 글을 기즈 추기경에게 보냈다. 1551년 1월에 장 추기경은 뫼동과 장베의 사제 자리를 그에게 주었지만, 라블레는 그곳에서 사제 역할을 한 적도 없고 그곳에 거주하지도 않았다.

1552년에 프랑스 교회 내부에서 군주가 사법권을 행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가 로마와 거의 절교하게 되어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위기가 한창 고조되었을 때, 라블레는 (새로운 서문을 붙여) 그의 가장 긴 책인 〈제4서〉를 완성하여 출판했다. 진지한 글과 우스꽝스러운 글이 모두 풍부하게 담겨 있는 이 책은 칼뱅의 예정설에 반대하여 신인협력설을 선전하고, 피에 굶주린 주교들을 조롱하고, 트리엔트 공의회를 바보들의 비가톨릭적 회의라고 비난하고, '통합주의적' 그리스도교 사상(고대의 지혜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과 성서에 입각한 그리스도교 사상을 결합한 것)을 옹호하고 있다.

이 작품도 역시 프랑스 궁정을 즐겁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으며, 자유주의적인 추기경 오데 드 샤티용에게 거만하고 공격적으로 헌정되었다.

이 책도 왕의 '윤허'를 얻었지만 역시 소르본 신학교의 비난을 받았고, 고등 법원은 1552년 3월 1일에 이 책의 판매를 금지했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위기는 지나갔다. 1553년 1월 9일에 라블레는 뫼동과 장베의 사제직을 사임했다. 그가 투옥되었다는 소문(아마 근거 없는 소문이었을 것임)이 돌았다. 그는 그 직후 죽어서 파리의 생폴데샹에 묻혔다.

영향과 평가

라블레의 작품들은 여러 학문, 즉 스콜라 철학의 신학과 성서적인 신학, 의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학을 깊이 공부한 사람의 작품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이미 인문학에 조예가 깊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종교적으로 일관성을 갖지 않았지만, 프란체스코회는 라블레를 자기 교단의 작가로 생각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라블레의 작품들을 '금서 목록'에 올려놓았고, 그의 작품들은 오랫동안 프랑스 밖에서만 출판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출판된 그의 작품들은 갈수록 신교도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후세의 프랑스 작가들(예를 들면 볼테르와 발자크 및 샤토브리앙)뿐 아니라 스턴과 스위프트 및 트롤로프와 킹즐리 같은 외국의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