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마 사마지

브라마 사마지

다른 표기 언어 Brahmo Samaj

요약 1828년 라모한 라이가 인도 캘커타(지금의 콜카타)에서 설립한 개신교와 유사한 힌두교 내의 일신교운동.
Brahmo는 Brahma라고도 씀.

브라마 사마지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신의 화현(avatāra)을 믿지 않으며, 업과 윤회에 대한 믿음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힌두교 의례를 배척하고 그리스도교의 예배의식 몇 가지를 받아들인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우상숭배, 다신교, 카스트 제도를 거부한다. 이 협회는 사회개혁에는 상당히 성공했으나 대중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라모한 라이가 힌두교 내부의 개혁을 추구한 반면 그의 후계자인 데벤드라나트 타고르는 베다의 권위를 거부하고 브라만교의 기초에 이성과 직관을 둠으로써 1850년 탈퇴했다. 그러나 그는 약간의 전통적인 힌두교 관습을 유지하려 했고, 케샵 천더 센이 이끄는 더욱 급진적인 세력은 이 협회에서 탈퇴하여 1866년 '인도 브라마 사마지'를 조직했다.

따라서 이전의 브라마 사마지는 '아디 브라마 사마지'(근본 브라마 사마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새 조직은 절충적이고 세계주의적인 것이 되었으며 사회개혁 투쟁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희망단을 후원하며 여성의 교육을 장려하고, 과부의 재혼 허용과 미성년자의 조혼 금지를 입법화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케샤브가 딸을 쿠츠 베하르의 왕자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했을 때 양쪽 다 미성년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사회개혁가로서 자신의 원칙을 어겼고, 이에 많은 추종자들이 반발하여 1878년 '사다란 브라마 사마지'(평등한 브라마 사마지)라는 3번째 모임을 결성했다. 사다란 브라마 사마지는 차츰 〈우파니샤드 Upaniṣad〉의 가르침으로 복귀했고 사회개혁운동을 계속해나갔다. 비록 20세기에 들어서 그 역량을 상실했지만 그들이 주장한 기본적인 사회 규범 이론만은 힌두교 사회에 받아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