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퍼트

보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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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출생 1374경, 프랑스 앙주 샤토보포르
사망 1447. 4. 11, 잉글랜드 햄프셔 윈체스터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윈체스터 주교, 추기경.

15세기 초반의 43년 동안 잉글랜드 정계를 주도했으며, 1435경~43년에는 약한 왕 헨리 6세의 정부를 이끌었다.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랭커스터 공작 존(곤트의 존)과 캐서린 스윈퍼드의 아들로서, 사촌인 리처드 2세 치세 때 옥스퍼드대학교의 학장(1397)과 링컨 주교(1398)가 되었다.

이복 형 헨리 4세가 1399년 즉위함에 따라 정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으며 1403년 대법관직과 국왕고문직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주교구인 윈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뒤 그는 대법관직을 사임하고 의회 내에서 헨리 4세의 총리인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애런들에 반대하는 파벌을 이끌었다.

그의 조카이자 정치적 동맹자였던 헨리가 1413년 헨리 5세로 왕위에 오른 뒤 다시 대법관직을 맡았으며 더 높은 지위로 오르기 위해 교황청 내의 지위를 얻으려 애썼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에 의해 추기경과 교황특사가 되었다(1417). 그러나 교황청 대변인 역할이 너무 커질 것을 두려워한 왕의 강요로 곧 추기경과 교황특사를 사임했다.

어린 왕 헨리 6세의 즉위(1422)로 보퍼트는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빈털터리 왕실에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어 자신의 부를 더욱 늘렸다. 파산 지경의 정부에 자금을 대주는 사람과 맞설 만한 적수는 별로 없었으므로 그는 더욱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1426년 성 에우세비우스 추기경과 교황특사가 되었는데 이때문에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에게서 국가와 성직 양쪽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끊임없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보퍼트는 글로스터의 공격에도 꺾이지 않고 어린 왕 헨리 6세의 지지를 얻어 1430년대 중반까지는 정부를 확고히 장악했다.

1435, 1439년에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백년전쟁(1337~1453)을 끝내기 위해 협상했으나 실패했고 1443년 정치에서 손을 뗐다. 그는 거만하고 이기적이며 지독하게 탐욕스러웠으나 정치적·재정적 통찰력에는 당대에 그를 따를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권위있는 해설서로는 L. B. 래드퍼드의 〈헨리 보퍼트 Henry Beaufort〉(1908)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