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벤투라

보나벤투라

다른 표기 언어 San Bonaventura
요약 테이블
출생 1217경, 교황령 바뇨레조
사망 1274. 7. 15, 리옹
국적 이탈리아

요약 영적 삶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회칙을 개정했다(1260). 그는 1587년에 교회 학자로 공포되었다. 1235년 파리대학교에 입학하여 1243년에 문학석사학위를 받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가입하여 1244년 이 수도회에서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진리추구를 신에 대한 예배 형태로 바꿈으로써 지금까지 해온 신학 연구를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탁발 생활 방식과 융합했다. 1254년 프란치스코 수도회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가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로서 보여준 모범적인 삶과 교리가 서방교회의 삶과 신앙에 끼친 영향을 인정하여 교황 식스토 4세는 그를 시성했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를 당대의 대표적 인물, 인간과 하느님에 관한 진리의 용감한 변호자, 신비주의적·그리스도교적인 지혜를 훌륭하게 해석한 인물로 평가한다.

보나벤투라(San Bonaventura)
보나벤투라(San Bonaventura)

영적 삶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회칙을 개정했다(1260). 그는 1587년에 교회 학자로 공포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피단차의 조반니로서 내과의사였고, 어머니는 리텔라의 마리아였다.

소년시절 그는 병에 걸렸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사경을 헤매다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1235년 파리대학교에 입학하여 1243년에 문학석사학위를 받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가입하여 1244년 이 수도회에서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을 받았다. 1243~48년 파리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를 가르친 스승들, 특히 할레스의 알렉산데르는 그가 기억력과 지력이 뛰어난 학생임을 인정했다.

그는 또한 라 로셸의 요한네스에게도 배웠다. 그들이 죽은 뒤에는(1245) 외데 리골과 멜리통의 기욤 밑에서 더 공부했다. 나중에는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 생캉탱의 게릭에게 영향을 받은 듯하다.

보나벤투라는 진리 추구를 신에 대한 예배 형태로 바꿈으로써 지금까지 해온 신학 연구를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탁발 생활 방식과 융합했다. 1248년부터는 성서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1251~53년에는 12세기 이탈리아의 신학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가 쓴 중세 신학 교과서 〈명제집 Sentences〉을 강의했으며, 1254년에는 신학석사가 되었고 프란치스코 수도회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에서 1257년까지 가르치면서 많은 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성서·〈명제집〉·〈개요 Breviloquium〉에 대한 주석들이 있다. 이 주석들은 그의 신학의 개요를 전해주며, 그가 성서와 초기 교회의 교부들(주로 아우구스티노)을 얼마나 깊이 이해했고, 철학자들(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얼마나 폭넓게 알고 있었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당대에 신학과 철학의 다양한 전통들을 조화시키는 보기 드문 능력을 지닌 인물로 특히 유명했다. 진리를 하느님의 사랑에 이르는 길로 파악한 그의 진리관이 담긴 종합적인 명제를 가지고 서로 다른 교리를 한데 묶었다. 1256년 그는 생아무르의 기욤에 맞서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내건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삶을 변호했다. 대학교수였던 기욤은 떠돌아다니며 구걸하여 먹고 사는 탁발수사들이 이상한 방법으로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복음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비판했으며,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 및 도미니코 수도회의 탁발수사들이 교직을 맡는 것을 막으려 했다.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변호한 점과 수사로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1257년 2월 2일 이 수도회의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성 프란치스코가 엄격한 청빈관(淸貧觀)에 따라 세운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당시 내부 불화를 겪고 있었다. 이 수도회 내의 한 분파인 영성파는 엄격한 청빈을 고집하여 수도회를 분열시켰으며, 다른 집단인 이완파(弛緩派)는 느슨하게 삶으로써 수도회를 어지럽혔다.

보나벤투라는 총회장의 권위를 적절히 사용하여 영성파는 달래고 이완파는 꾸짖음으로써 수도회의 통일을 유지하고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라 수도회를 개혁했다. 이렇게 회복과 화해의 사역이 성공을 거둔 것은 보나벤투라가 약한 몸을 이끌고 수도회의 각 관구들을 찾아다니고, 수도회의 이상을 솔선수범하여 실천한 덕분이었다. 그는 각 관구를 찾아다니면서 언제나 복음을 설교했는데, 설교가 매우 세련되어 가는 곳마다 대단히 웅변적인 설교가로 인정받았다. 그는 신학자로서 영적인 삶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근거하여 수도회를 부흥시켰으며,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완성으로 여긴 자신의 명상 체험을 쓴 신비주의적인 논문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혀놓았다.

그의 저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여행 Journey of the Mind to God〉(1259)은 사람이 피조물로서 성 프란치스코를 본받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관상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존경을 받은 그는 회칙을 개정했고(1260), 이 수도회를 위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Life of St. Francis of Assisi〉(1263)를 새로 썼으며, 생아무르의 기욤이 하던 역할을 떠맡은 파리의 신학 교사 아브빌의 게라르두스의 공격으로부터 수도회를 보호했다(1269). 또한 그는 1267~73년 자신들의 철학으로 계시를 비판한 파리의 비(非)정통파 교수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지함으로써 교회를 보호했다.

서로 다른 견해를 조화시키는 보나벤투라의 지혜와 능력에 감동받은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비록 그가 1265년에 교황 클레멘스 4세로부터 잉글랜드 요크의 주교로 임명된 것을 사양한 것을 알면서도, 1273년 5월 그를 이탈리아 알바노의 주교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레고리오는 11월에 리옹에서 보나벤투라의 주교 임명식을 거행했으며, 1274년 5월 보나벤투라는 그곳에서 수도회 총회장직을 사임했다. 제2차 리옹 공의회가 열렸을 때에는 교회개혁에 앞장서 재속(교구) 성직자들과 탁발수사들을 화해시켰다. 또한 그리스 정교회를 회복시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연합시키려는 데도 관여했다.

그는 리옹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 죽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혜롭고 거룩한 인물, 자비심과 덕이 풍성한 인물, 자기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사로잡는 인물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황이 공의회에 참석한 날 프란치스코 수도회 부속 교회당 뜰에 묻혔다. 그가 얼마나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는지는 리옹 공의회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다음과 같은 선언문에 잘 나타나 있다. "장례식 때 사람들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주께서 그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그를 아는 사람마다 그를 깊이 사랑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보나벤투라가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로서 보여준 모범적인 삶과 그의 교리가 서방교회의 삶과 신앙에 끼친 영향을 인정하여 교황 식스토 4세는 그를 시성했으며, 식스토 5세는 그에게 교회박사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를 당대의 대표적 인물, 인간과 하느님에 관한 진리의 용감한 변호자, 신비주의적·그리스도교적인 지혜를 훌륭하게 해석한 인물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