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크렐

베크렐

다른 표기 언어 (Antoine-)Henri Becquerel
요약 테이블
출생 1852. 12. 15, 파리
사망 1908. 8. 25, 프랑스 르크루와시
국적 프랑스

요약 베크렐은 퀴리부인의 스승이며, 최초로 방사능을 발견하여 1903년 퀴리 부부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몇 대에 걸친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저명한 과학자였다. 당시 물리학의 주요 연구분야 중 하나였던 적외선 복사에 관심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우라늄 화합물에 적외선을 쬐었을 때 나타나는 인광 결정체들의 스펙트럼을 조사하며 아버지의 연구를 확장시켰다. 1896년 연구 중 우연히 우라늄염에서 외부자극 없이도 끊임없이 모종의 복사선, 즉 방사선이 방출되는 것을 발견했으나, 이 발견의 중요성을 훗날 퀴리부인이 이 현상을 방사능이라 이름붙이고 새로운 방사능물질을 발견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1901년 방사능의 생리학적 효과에 관한 논문을 써 그것이 의학적으로 사용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교육과 수련
  3. 복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
  4. 그 이후 업적
베크렐((Antoine-)Henri Becquere)
베크렐((Antoine-)Henri Becquere)

개요

우라늄 및 다른 물질들을 조사하다가 방사능을 발견했다.

1903년 피에르·마리 퀴리 부부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물리과학). 몇 대에 걸친 과학자 집안의 일원으로 유명한 사람으로는 할아버지 앙투완 세자르 베크렐, 아버지 알렉상드르 에드몽 베크렐과 그의 아들 장 베크렐이 있다.

교육과 수련

루이 르 그랑 리세에서 초기교육을 받은 앙리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정규 과학교육을 받았고(1872~74), 다리 및 고속도로 학교에서 공학자로서 훈련을 받았다(1874~77). 연구하고 가르치는 직책을 맡으면서 동시에 수년 동안 다리와 고속도로 분과에서 공학기사로 있었고 1894년 기사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첫번째 학술적 직책은 1876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조교수였고 1895년에는 그곳의 물리학교수 자리를 이어받았다. 동시에 박물관에서 아버지의 박물학 조교였는데 아버지가 죽은 후 그곳에서도 물리학 교수직을 떠맡았다.

전기학·자기학·광학현상 및 에너지는 19세기 동안 물리학의 주요연구분야였다. 몇 년 동안 젊은 베크렐의 연구는 자기장에 의한 빛의 편광면의 회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는 마이클 패러데이가 처음 제기했고 베크렐의 아버지도 기여한 바 있는 주제였다. 베크렐은 적외선 복사에 관심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적외선을 쬐어주었을 때 나타나는 여러 인광 결정체들의 스펙트럼을 조사했다(전자기복사). 그가 몇몇 우라늄 화합물들에서의 인광 방출과 빛의 흡수와의 관계를 연구함으로써 아버지의 연구를 확장시켰다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1889년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896년에 이르러서는 이미 뛰어난 업적을 낸 물리학자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연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인광물질을 능숙하게 다루었고, 우라늄 화합물에도 친숙했으며, 사진을 포함하는 실험 기법에서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때문에 그는 방사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복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

1895년말 빌헬름 뢴트겐은 X선을 발견했다.

베크렐은 유리 진공관에서 나오는 X선이 음극선과 부딪치면 형광을 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사선과 가시광선 사이에 어떤 기본적인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여, 어떻게 자극을 받았든지 모든 발광 물질은 X선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설명하려 했다. 이 가설을 실험하기 위해 사진 건판을 불투명한 종이로 싸서 투과한 복사선만이 감광제에 닿도록 한 다음 그 위에 인광 결정체들을 놓았다. 그는 그의 실험장치들을 여러 시간 동안 햇빛에 노출시켜 늘 하던 방식대로 결정들을 여기(勵起)시켰다.

현상을 해보니 사진 건판들은 광물 표본의 윤곽을, 이어서 계속된 실험에서는 결정과 건판을 쌌던 종이 사이에 끼워넣어진 동전이나 금속 조각의 상을 드러냈다. 베크렐은 특정 우라늄염이 특히 활발히 작용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 발견을 1896년 2월 24일의 과학 아카데미 모임에서 발표했다(우라늄). 따라서 그는 이 발광물질이 가시광선을 방출할 때 동시에 X선과 매우 비슷한 어떤 것을 방출시킨다는 자신의 견해를 확증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주에 우라늄염들은 햇빛 속에 있는 자외선에 의해 빛을 발하게 되지 않을 때도 계속해서 이 투과성 복사선을 방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신기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오래 지속되면서 보이지 않는 인광을 가정했다. 그가 곧 우라늄 금속에서 이 작용을 추적해냈을 때 그는 이를 금속 인광의 독특한 현상으로 해석했다.

나중에 퀴리 부인이 방사능이라 이름붙인 이 현상에 대해 그는 1896년 7편의 논문을 출판했다.

1897년에는 단 2편을 출판했고 1898년에는 전혀 발표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 주제에 대한 베크렐 자신과 과학자 세계의 관심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수많은 복사선(예를 들면 음극선, X선, 베크렐 선, 방전선, 陽極線, 전파, 가시광선, 스펙트럼, 개똥벌레나 다른 발광체들에 의한 빛들)에 대한 연구들이 행해졌고 베크렐 선이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훨씬 더 대중적이었던 X선은 더 뚜렷한 그림자 사진을 더 빨리 찍을 수 있었다. 방사능 연구는 1898년에 알려진 또다른 원소인 토륨(게르하르트 카를 슈미트와 퀴리 부인이 독립적으로 발견), 새로운 방사능 물질인 폴로늄과 라듐(퀴리 부부와 동료 귀스타브 베몽에 의한)의 발견으로 확장되었고, 세계와 베크렐에게 그의 발견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그 이후 업적

자신이 창시했던 분야로 되돌아온 베크렐은 3가지 중요한 공헌을 남겼다.

하나는 1899, 1900년에 전기장과 자기장 내에서 복사선의 한 구성요소인 베타 입자들의 편향을 측정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하와 질량의 값이 얻어지자 그는 베타 입자가 J.J. 톰슨이 그 당시 밝혀낸 전자와 똑같은 것임을 보여주었다. 또 처음 준비되었을 때 방사능이 없던 우라늄이 그의 방사능을 되찾는 데 비해 우라늄 속에서 방사능 물질이라 추정되었던 우라늄 X는 오래지 않아 방사능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프레드릭 소디가 토륨 X와 토륨에서 비슷한 붕괴와 재생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방사능의 변환이론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이론에서는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자발적으로 변화되는 원자구성입자의 화학변화로 이 현상을 설명했다.

베크렐의 마지막 주요업적은 방사능의 생리학적 효과에 관한 것이었다. 베크렐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퀴리가 라듐 시료를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녔을 때 생긴 화상에 대한 그의 1901년의 보고서는 의사들의 연구를 고무시켰고 결국에는 의학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베크렐은 외국 학회의 회원이 되는 명예도 누렸으며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는 그를 회장이자 종신 간사로 뽑았다.